토론 수업 강의실 문을 열자 테이블 위에 음료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지혜님, 수박주스 사다 놨으니 드시면서 하세요."
학원 대표님이 준비해 둔 한여름을 닮은 붉은색의 음료는 수박주스였다.
감사한 마음에 반갑게 받아 들었지만,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최근 몇 년 간 커피 이외의 음료를 마신 적이 없는 듯하다.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땡모반을 들이키긴 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부러 찾지 않았다. 유지어터 생활이 20년 가까이 접어들면서 액상과당이 가득한 주스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시기에 따라 식단 구성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한 가지는 오래도록 지켜왔다. 과일은 과육 그대로 먹되 주스로 마시지는 않았고,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찾던 프라푸치노도 끊었다. 철저하게 식단을 관리해 온건 아니지만, 달콤한 음료만큼은 가장 단호하게 선을 그어온 영역이었다.
최고 기온이 32도를 웃도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쏟아진 찬란한 햇살에 마음은 화창해졌지만, 더운 건 더운 거였다. 보통 오전 수업은 소규모로 한산한 분위기인데, 이날은 정원이 꽉 찰 정도로 많은 학습자들이 참석했고, 인원수만큼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이어졌다.
영어 토론 수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다. 평소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고르고 의견을 정리해 말하는 일은 모국어로도 쉽지 않다. 하물며 영어로 표현하는 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 우리 반은 초급반이라,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자체를 버거워하는 분들이 많다. 특히, 처음 수업에 참여한 분들은 긴장을 많이 하신다. 그 어색함으로 인해 큰 마음먹고 온 영어에 대한 열정까지 사그라들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수업을 다정한 온도로 채우는 데 집중한다. 마음이 편안해야 말도 나온다. 수업을 할수록 안락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힘을 실감 중이다.
다행히 이 날은 열정적인 학생들이 참석해 열띤 대화가 이어졌다.
나이가 들며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사람을 만날 때 자연스럽게 상대의 장점을 찾고 그걸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올해 안에 외국인과 자연스러운 스몰토크를 나누겠다는 목표를 향해 매일 수업에 참석하는 C 학습자의 성실함과 열정. 타인의 강점을 발견하여 따뜻한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M 학습자의 열린 마음. 영어 공부가 너무 막막하고 어렵지만 끝까지 문장을 만들어 말해보려는 J 학습자의 투지와 노력.
어른이 될수록 삶은 점점 익숙한 것들로 채워진다. 늘 가던 곳, 늘 만나던 사람, 늘 하던 생각. 익숙하지만 그만큼 변화의 여지는 줄어든다. 생각과 가치관이 고루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이 들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경험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사람의 태도를 배우고, 새로운 목표를 응원하고, 평소라면 고르지 않았을 음료를 한 번 마셔보는 것까지도.
쉬는 시간, 테이블 위에 놓인 수박주스로 시선이 갔다.
'마셔볼까?'
빨대를 꽂았다. 한 모금 들이켠 순간, 눈이 번쩍 떠질 만큼 청명하고 시원한 달콤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맛있다고?' 문득 칼로리가 궁금해졌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훨씬 낮았다.
이 청량한 음료가 내 취향일 줄이야..! 대표님의 센스 있는 메뉴 선정 덕분에, 평소라면 지나쳤을 새로운 즐거움을 이렇게 또 하나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