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개의 감사일기가 선물한 마음의 회복력
영어 토론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정말 다양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가끔은 한국어로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낯선 질문들과 마주친다.
토론의 진행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학습자들의 성향을 파악해, 그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입을 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오하거나 철학적인 주제가 던져질 때면, 진행자인 나부터 질문을 깊이 이해한 후 생각을 정리하고 수업에 들어간다. 그래야 학습자들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What is something you take for granted, even though it might actually be a privilege?"
(실제로는 특권일 수도 있는데, 당신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주제로 두 번의 클래스를 진행했다. 대다수의 학습자분들이 수업 전 그날의 토론 주제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면서도 이 질문이 특히 어려웠다고 했다. 모국어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인 데다 영어로 번역까지 해야 하니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싶었다. 추가로 1분 정도의 시간을 더 드린 후, 각자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강의실에는 집중으로 인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미리 작성해 두었던 내 답변들을 훑어보았다.
"I try to practice daily self-reflection and gratitude so I don’t take things for granted. Even though each day brings its own worries and challenges, being able to live a healthy, happy life is something I find incredibly valuable and precious."
(나는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고 감사함을 느끼며 매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게도 걱정과 문제들이 찾아오지만,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훨씬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지만, 토론 수업의 묘미는 참여자의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이기에 아주 간략하게만 준비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마음도, 나의 하루도 처음부터 이렇게 단단했던 건 아니다. 변화는 아주 작은 '감사일기' 한 줄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내 곁에 이미 존재하지만 미처 발견되지 못한 채 스쳐갔던 나의 소중한 하루들. 그 작고 반짝이는 순간들을 사진으로, 문장으로 기록하다 보니 햇수로는 2년이 되었고 그 사이 2천 개에 가까운 고마움들이 내 삶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언제부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멘탈이 건강하다거나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공신은 단연 감사일기에 있다고 믿는다.
이미 내 삶 곳곳에 자리했던 작고 희미한 감사함들을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 눈으로 아이들을, 남편을, 주변 사람들을, 부엌과 거실을, 하늘과 거리를, 문장과 단어를, 표정과 기운을 바라보면 되는 거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산 만 오천 원짜리 수박이 완전 꿀맛일 때,
대만여행 첫날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청년을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아이들 줘도 되냐며 츄파춥스를 건넬 때,
후딱 만든 유부초밥과 주먹밥을, 아이들이 최고라며 싹 비울 때,
에어컨 켜고 소파에 드러누워 이 바카라 저 바카라 읽을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려온 바카라이 완전 내 스타일일 때,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어찌어찌 운동을 끝나고 개운하게 샤워 후 커피 마시며 잠시 수다 떨 때,
열정적인 학습자들 덕분에 수업 시간이 쏜살같이 흐를 때,
동네 언니가 내가 생각났다며 건넨 사과식초와 올리브유를 흠뻑 적셔 통밀빵과 함께 먹을 때,
이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많은 이들이 강한 멘탈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니, 삶을 기록하며 달라졌다. 세상에 처음부터 멘탈이 강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흔히 '멘탈이 건강하고 마음이 단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약해졌다가도, 불안했다가도, 자신감이 바닥을 치더라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 즉 '회복력'이 좋은 사람일 뿐이다.
누구나 흔들린다. 모두가 불안하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신감과 자존감 넘치는 사람들조차 매일 밤 걱정을 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분야와 종목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무가치함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며, '왜 나는 이렇게 나약할까' 주기적으로 자문하며 밤을 보낸다.
그러니 중요한 건 '불안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그 이후에 찾아오는 감정과 마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냐다. 걱정과 두려움 안에서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실행하고, 한 걸음씩 나아가며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함에도 연습은 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