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 축제=병원 사람들과 봄소풍
5월 17일 일요일
대구 수성못 축제에 참석하게 됐다. 무려 천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다. 나는 전날 초저녁부터 서둘러 이불을 덮고는 새벽에는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잠을 청하지 않았다.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지 못할까 봐였다.
"이번에도 못 가게 되면 어떡하지?"
지난 몇 년간 온전치 못한 컨디션 탓에 일은커녕 사소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날들이 마음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별로 원하지 않는 일 앞에서는 그렇게까지 겁먹지 않는데
불안이 있으면 진짜 마음이 보인다. 나는 호들갑을 떨면서도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갈까 말까를 고민하면서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알았다.
"나는 누구보다 그 자리에 가고 싶었던 거구나."
마치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수성못 축제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내 손에 달린 사람처럼 비장해졌다. 내가 컨디션 난조로 조기 퇴장이라도 하면 축제 부스들이 하나둘 철수하고, 수성못 오리배마저 영업 종료에 들어갈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온 신경의 촉각을 몸 상태에 몰아넣고 있으면 가끔 스스로도 기가 찬다. 누가 보면 나의 상태와 대구 시민들의 행복지수가 실시간 연동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도, 왔는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재난영화 주인공처럼 배를 움켜쥔 채 “여기서 아프면 안 된다” 같은 대사를 속으로 읊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평온하게 돌아가는데 나만 늘 인간형 비상대피 매뉴얼처럼 군다. 참 피곤한 성격이다. 알면서도 매번 이렇게 긴장하고야 마는 것이다.
환자놀이 초반에는 살아남기 위해 경계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증상은 수도 없이 나타나 긴장으로 범벅되어 살아왔다. 괜찮은 척 웃고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는 혹시 하는 무서움. 아직도 몸에 기생하고 있었다는 게 유감스러웠다.
모두 되지도 않는 걱정이었다. 서둘러 도착한 덕에 마음껏 주위를 서성이고 기분 좋게 맨발로 흙을 밟았다. 지난 4월, 벚꽃을 보러 온 지 겨우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풍경은 또 새롭게 느껴졌다.
내가 잠을 거부하며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밤새
바짝 말라버린 안구로 맞이한 수성못의 아침은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님도 도착하셨다. 자주 보는 얼굴들인데도 공간이 바뀌자 착시가 일어났다. 공간이 주는 압박감이 사라진 자리에 느닷없는 친밀함이 들어찬 것이다.
병원이나 일터라는 공적인 프레임이 걷히고 나면 자연 속을 함께 걷는 대등하고 인간적인 몸이 된다. 늘 보던 얼굴이 새롭게 느껴지는 건, 위도와 경도가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닐 테다.
서로를 가두던 딱딱한 역할극이 끝나고 마침내 서로의 진짜 알맹이를 날것으로 마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의사나 환자, 무슨 무슨 직함 같은 것들을 다 빼고 남은 진짜 당신과 내가 거기에 있어서다.
이틀 전에도 주사를 맞느라 뵈었다. 그런데 원장님은 되게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해맑게 웃으시며 손바닥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만큼이나 내가 반가웠다는 걸.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분께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 같다. 원래 격식이라는 건 무겁고 촌스러운 것이어서 그걸 차려입은 사람들은 대개 바닥으로 침잠하기 마련이다.
허리를 바짝 세우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자신이 얼마나 품위 있는지를 온몸의 무게로 증명하려 애쓰는 이들을 나는 자주 보았다.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은 달랐다. 깃털처럼 가벼운 기류를 몸 주변에 두른 채, 세상의 모든 딱딱한 규칙들을 없애려는 듯 가볍게 사뿐사뿐 걸으셨다.
그 경쾌한 발걸음이 주변의 공기를 기분 좋게 환기시켰다.
사람 한 명이 풍경의 기압을 통째로 바꾸는 순간이 있다. 그날이 딱 그랬다. 그 리드미컬한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세상이 정해둔 엄숙함에 굴복하지 않는 명랑한 모습이 못 견디게 좋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무게들이 조금씩 증발하는 것 같았다.
어깨에 미스코리아들이 두르는 띠를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속닥속닥 물었다.
“저분이 병원장님이세요?”
나는 어깨가 으쓱해져서는 들으라는 듯 크게 대답했다.
“네!” (조금 민망할 정도로 우렁차게)
내가 원장도 아닌데 왜 그렇게 자랑스러웠을까. 아마 누군가를 믿어온 사람만이 가지는 자신감 같은 거였을 것이다. 사람들 시선 속에서 표본처럼 서 있는 그분에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대답해주고 싶었다.
네, 제가 아는 좋은 의사 맞습니다, 하고.
주치의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듬직하고 자유롭다. 듬직함은 통증의 크기를 일일이 재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온다. 몸의 신호를 초소처럼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환자이고 그분은 의사다.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한 사실인데 사람을 놀랄 만큼 편안하게 만든다. 그 곁에서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 속보처럼 중계하지 않아도 된다. 통증의 미세한 변화에 귀를 바짝 세우던 행동도 잠시 휴가를 떠난다. 그러면 비로소 시선이 몸 밖으로 향한다. 나무가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바람이 지나가는 결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한층 또렷하게 들린다. 아픔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근사함은 빳빳하게 다려진 깃보다 조금 풀어진 채로도 끝내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구 쪽을 바라봤다. 원장님이 도착하시자 공중에 붕 뜬 듯하던 마음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우리는 그제야 안심했고 그제야 제대로 웃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멀리 육지를 발견한 것처럼 각자의 마음이 닻을 내렸다.
경직된 질서만 있는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숨이 막히는지.
원장님은 늘 그 질서에 작은 숨구멍을 내는 분이었다.
언제든 유쾌한 농담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그분 주위에는 있었다. 흔히 말하는 서글서글함과는 달랐다. 흐르되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단단하고 맑은 이들의 몸에만 배어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류의 자유였다.
공원 귀퉁이에는 하얗고 커다란 덩어리가 있었다. 익숙한 병원 로고가 박힌 차량. 보자마자 목구멍 안쪽이 왈칵 조여들며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울음의 전조였다.
생각해 보면 기묘한 일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왜 내 삶의 가장 깊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그 하얗고 커다란 차가, 그곳의 의사가, 그리고 병원이라는 곳이 오랜 시간 동안 내 일상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타인처럼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수년이라는 세월 동안 병원에는 내 몸과 마음의 구체적인 고통이, 막연하다 못해 아득했던 불안이, 실낱같아서 더 잔인했던 희망과 셀 수도 없는 좌절이 쌓여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끝끝내 회복해 보겠다고 몸부림치던 시간들이 실려 있던 장소. 그래서 내게 병원 차는 삶의 어떤 시절을 통째로 접어 실어 둔 메타포처럼 느껴졌다.
작년에 저 차에 몸을 싣고 입원실로 향했던 기억이 스치자, 저 흰 덩어리가 상징물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작은 호전 하나에 온 우주를 얻은 양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행복을 징검다리 삼아 간신히 견뎌냈던 나날들이, 공원의 푸른 풍경 위로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지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축제가 끝나자 몸은 전기가 끊긴 가전제품처럼 꺼져버렸다. 사지 관절마다 통증이 스파크를 튀기며 경고음을 울렸다. 눈꺼풀은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나 하강하고 있었다. 몸은 마지막까지 괜찮은 척하던 사람에게 이제 거짓말은 끝났다고 통보하는 것 같았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탈출용으로 안성맞춤인 인사말을 입안에서 굴리며 눈치를 보던 참이었다. 그러나 다정함이 체화된 사람들의 레이더는 어마무시하게 정확하다. 원장님과 직원들의 식사 자리에 엉거주춤 꼽사리를 끼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붉고 매콤한 비빔냉면. 면발을 가위로 자르고 한 젓가락 크게 입에 넣는데 신기하게도 꺼진 배터리에 불이 들어오듯 기운이 솟구쳤다. 그것은 캡사이신의 효능이 아니었다. 둘러앉은 이들이 아낌없이 뿜어내는 농도 짙은 에너지 덕분이었을 것이다. 응급상황 때 다친 줄 모르고 움직이는 것처럼 도파민 같은 보상 반응이었을까.
그 온기에 기분 좋게 취해버린 나는 탈출 계획을 깨끗이 접었다. 2차로 이어진 카페 자리까지 뻔뻔하게 합류해 무려 네 시간을 함께 웃었다. 방전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곳에서 나는 다른 이들의 다정함으로 완충되어 돌아왔다.
진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방전돼서 입에서 스윗 홈!! 만 나오고 있을 때 인심 좋은 원장님의 에스코트가 시작됐다.
집까지 태워다 주시겠다는 스윗한 제안이었다.
등을 떠밀어주는 직원분들 덕분에 졸지에 귀빈 대접을 받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회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와~ 좋겠다, 편하게 가요!”
매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하루만 지켜내기에도 벅찰 텐데 하물며 내 몫의 주말을 고스란히 지켜내도 모자랄 그 귀한 날에, 노는 노동(?)을 자처하며 나를 위해 주말 한편을 선뜻 내어주셨다.
당연하지 않은 배려를 원래부터 그러기로 되어 있었다는 사람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해 주신다. 그 깊은 인품과 따뜻한 배려에 나는 고작 감사하다는 말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존경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의사라는 직업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시간 보여준 태도와 바카라임감, 환자를 바라보는 눈빛과 말투 같은 것들이 작은 안전지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맨발 걷기를 할 때도, 교회에 갈 때도 늘 과분할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대구에서는 늘 뚜벅이로 다니는 내가, 그럴 때면 문득 상상을 하곤 한다.
언젠가 원장님께서 서울에 오시는 날엔 이번엔 내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 직접 모시고 다시 배웅해 드리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내가 나의 쓸모를 의심하며 무너질 때마다 원장님은 언제나 내 존재를 정돈해 주곤 하셨다. 그 보이지 않는 응원은 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차 문을 닫고 나와 집으로 걸어가며 입술을 떼어보았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말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가슴으로 꾹꾹 눌러쓴 비밀번호 같은 혼잣말이었다. 차가운 가슴에 더운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샤워하는데 몸에 붙들려 있던 긴장이 물기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숨어 있던 통증들도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에서는 잘 견뎌내던 내가 왜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야 마음 놓고 아파지는 건지.
본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으려는 적당한 경계심, 잘 지내고 있음을 증명하려는듯한 웃음, 타인의 시선에 맞춰 세운 바른 자세들. 그래서인지 적당한 긴장은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플 시간도, 아플 자격도 잠시 유예되는 것만 같다.
이제야 마취가 풀린 환자처럼 통증이 뒤늦게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온종일 바깥에서 버티기 위해 붙들어 두었던 긴장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만들어 내는 반작용일 것이다.
이건 오직 내 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상한 안도감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꼿꼿하게 버티느라 애썼다고, 이제는 마음 놓고 아파도 된다고, 방 안의 공기가 온몸으로 나를 감싸 안아줄 때 나는 비로소 안심하고 마음껏 앓는다. 바깥에서는 차마 아플 수도 없었으므로.
긴장이 선물한 무감각의 시간 뒤에 찾아오는 새살 같은 고요의 통증이 나를 천천히 치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