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은 나를 살게 했고, 용기는 오늘을 버티게 했다
가혹한 통증에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고 있는데 쉬고 싶었다. 딱, 잠깐만.
삶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원망과 증오라는 감정은 불길과 같다. 생각이라는 땔감을 던져 넣는 한, 불은 멈추지 않고 내 영혼을 새까맣게 태워 버린다. 상처받은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스스로 그 지옥 같은 불꽃에 연료를 공급한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의 독백은 장작이 되어 꺼져가던 낙엽에 다시금 사나운 불을 지핀다.
원망은 벌하는 무기라고 착각했었다. 그것은 내가 검은 독약을 치사량만큼 마시면서 상대든 대상이든 쓰러지기를 바라는 잔인한 기만이자 망상에 불과했다. 피를 토하며 타들어 가는 것은 언제나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이 파괴적인 불꽃을 잠재우는 유일한 비밀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미련하게 공급하던 연료를 거두어들이는 것뿐이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억울함에 집착이라는 바람을 불어넣지 않는 것.
가슴을 찌르는 서운함에 원망이라는 장작을 더 이상 보태지 않는 것.
손을 멈추면 그토록 사납게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하던 불길도 무력하게 사그라진다. 그리고 내 영혼을 갉아먹던 기억들은 바람에 날려갈 한 줌의 무해한 재로 돌아갈 뿐이다.
불을 끄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다. 불을 지피던 내 손길을 거두는 일이다.
고통 앞에서 대바카라 없이 연약하고, 얄팍해진다. 몇 년 전 내 몸의 온갖 스위치들이 제멋대로 픽픽 꺼지고 켜지던 자율신경실조증 첫 치료를 시작했을 때 내가 원한 건 대단한 삶의 구원 같은 게 아니었다.
통증을 단번에 리셋해 줄 신의 손 '명의'였다.
그때의 난 당장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썩은 동아줄인지 독사 꼬리인지 분간할 겨를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지푸라기란 지푸라기는 다 쥐어뜯으며 매달렸다.
내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뚱뚱한 괴물 같았으니까.
그러다 문득, 병원 대기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다른 환자들의 얼굴이 시야에 벼락처럼 꽂혔다. 얼굴에 불안과 체념이라는 영구문신을 새겨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영혼이 탈곡된 표정들을 훔쳐보는데 얼음송곳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당연하다는 듯 프리패스로 누리고 있는 의학적 케어와, 내 징징거림을 다 받아내 주는 주변의 따뜻한 돌봄들. 그건 매달 자동 결제되는 넷플릭스 멤버십처럼 내 통장에서 나간 정당한 대가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밤새 기도를 올려도 당첨되지 못한 로또 같은 행운이었다.
그 진실을 마주하고 나니, 방금 전까지 의사 선생님 앞에서 “왜 이렇게 빨리 안 낫냐”며 속으로 투덜대던 내 알량한 간사함이 단숨에 부끄러움으로 명치 통증을 유발했다. 뷔페에서 지 배부르다고 음식 맛없다며 투정 부리다 문밖의 굶주린 아이와 눈이 마주친 어른이 된 것 같은 가바카라이었다.
몸이 고장 났을 때 손을 내밀어 줄 존재가 반경 1미터 안에 있다는 것. 내 위태로운 일상을 받아내 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다. 이 아름다운 지구 서바이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프리미엄 패키지’ 같은 것이다.
오래전 나는, 열심히 치료받으면 모든 증상을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다시는 아프지 않은 완전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내가 견딘 시간과 간절함만큼은 삶이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정한 결말을 내지 않았다. 완치라는 신기루를 좇는 동안, 아무리 많은 것을 쏟아부어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5월 18일 월요일
매일매일의 스코어를 정확히 기록하려는 감사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의사: “옆벅지는요? 어제 잠은 잘 주무셨어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몸의 최신 데이터를 보고 드린다. 서사나 눈물겨운 극복기는 오늘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환자: “옆벅지는 5점이에요. 앞벅지는 좋아졌어요. 이제는 5분 정도 서 있어도 큰 무리가 없어요.”
의사 선생님도 오늘은 더 묻지 않으셨다. 서로 알고 있는 것 같다. 300초 동안 직립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우리는 정확한 고통과 정확한 회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여하튼 그것만으로도 넘치게 만족하고 있었는데 원장님은 넉살 좋은 웃음을 터뜨리셨다.
의사: "5분 갖고 되겠어요? 더 좋아져야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대중교통을 탈 때도 내가 가장 먼저 탐색한 것은 사치스럽게도 앉을자리나 기댈 벽이었다. 단 1분. 시침이 고작 한 칸을 움직이는 그 짧은 우주 속에서 내 다리는 지구의 모든 중력을 홀로 감당하는 고층 빌딩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금세라도 뿌리째 뽑혀 나갈 것 같은 비명이 양쪽 허벅지 무릎 아래까지 터져 나왔다. 서 있는 것이 투쟁이었기에 이 평범한 5분은 내 세계의 판도를 바꾼 지각변동이자 기적이었다.
내 의도와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못할 때 쉽게 무력감에 빠지거나 내가 부족했나?내 진심이 잘못됐나? 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곤 한다. 왜 그토록 자바카라했을까 돌아보니 단단한 기준이 내부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과라는 영역은 타이밍, 타인의 감정, 운 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곳이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내 의도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았는가?’라는 명확한 내부의 자로 재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기에 흔들리지 않을 내면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 기준이 서 있어야 결과와 상관없이 나의 진심과 노력이 나만의 자산으로 남는다.
세상이 주는 결과가 어떠할지라도 내가 쏟은 진심과 노력의 가치는 결코 바래지 않을 테니까.
요즘 무력감은 좀 어떤지, 밤마다 찾아오던 악몽의 농도는 좀 옅어졌는지 물어보실 때는 이를 악물었다. 둑을 터뜨리는 순간, 슬픔들이 굴비 엮이듯 끝도 없이 줄을 지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예전보단 아주 많이 좋아졌어요."
뒤에 따라오는 폭풍을 황급히 덮었으나, 괜찮다고 웃어넘긴 자리에 서늘한 바람이 핥고 지나갔다. 참아낸 눈물의 무게만큼 마음의 연한 살점이 조금 아려왔다.
나는 요즘 또 신생아 루틴 속에 살고 있다. 먹고, 자고.
최근 일주일, 지금 이 순간까지 편안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몸 안에 달린 모든 감각 기관이 '과로'만 선택한 것처럼 통증도, 소음도, 진동도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침대째로 아래로 추락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래도 잠은 왔다. 잠이 들면 잠깐 현실과 연락이 끊겼다. 마취도 아닌데 잠깐 죽은 척할 수 있다는 건 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면 다시 현실 입장. 자동 로그인처럼 고통이 재연결됐다. 고통 정기구독 서비스를 강제 이용하는 기분이었다. 해지도 안 된다. 고객센터도 없다. 사라지고 싶었다. 아주 잠깐만. 그건 죽고 싶다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삶이 버거워도, 내가 간신히 지켜온 작은 일상의 루틴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것 같을 때 내 몸과 마음에 분풀이를 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다.
그것은 결국 내가 내 삶의 난이도를 쓸데없이 높이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이 공포라는 놈이 칼날 같아서 닿기만 해도 인생의 막이 내리는 줄 알았다. 마음이 베이고, 피 흘리고, 그대로 암전. 생명력은 질겨서 어느 날 깨닫고 마는 것이다.
"왜 아직 안 끝났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감동 휴먼 다큐의 오프닝이 아니다. 밀린 공포 공과금을 고지서로 받아 든 기분이다. 고비를 넘겼더니 평온이 아니라 매일 아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발목을 찌익 잡고 늘어지는 만성적인 질척임이다.
흔히들 ‘적응’을 성숙과 극복이라는 예쁜 포장지에 싸서 말하곤 하지만, 내가 배운 적응의 진짜 얼굴은 좀 투질구레하다. 매일 조금씩 바닥을 향해 내려앉는 기준선을 양팔로 간신히 끌어안은 채 “이 정도면 아직 싱크홀 수준은 아니야”라며 버티는 일이다.
요즘 나의 하루는 늘 구질구질한 상태 업데이트로 끝난다.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정산하는 나의 독백은 대개 이런 식이다.
“힘들어 주께따. 그래도 뭐 오늘은 꽤 견딜 만하네. 다행이다.”
최악은 면했다는 안도감이 이만큼 서글픈 적이 있었나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와중에도 매일의 등급을 매기며 살아내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도 내일 되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오늘의 컨디션: 덜 처참함. 축하합니다.
내일은 다른 서비스가 제공될 예정입니다.
오늘만으로도 힘들었으니 내일의 걱정은 미룬다.
미루지 않으면 행복도 느낄 수 없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은 밤과 잠이라는 완벽한 단절을 선물했다. 밤이 되면 어둠이 내리고 만물이 잠드는 이유는 오늘 하루를 여기서 일단 매듭짓고 쉬라고 대자연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눈을 감으면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외적인 탐험이 모두 멈춘 암흑 속에서 외면해 왔던 목적지를 향해 들어간다.
바로 나에게로의 여행이다. 남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행복을 느끼고 회복하는 데 쓰자.
내일의 짐을 지고 갈 미래의 나를 신뢰한다.
무조건 빨리 나아야 한다고, 이것만 좋아지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칼끝을 겨누던 시절이 있었다. 어떻게든 삶을 붙잡고 의미라는 것을 부여하고 싶던 날들. 기를 쓰고 잡은 줄이 끊어졌을 때 몸과 마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의미에 집착할수록 무너짐의 낙차는 더욱 컸다. 그 절망의 끝에서 깨달았다. 삶은 증명해 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무언가를 대단한 의미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몸을 맡겨본다.
어떻게 되든 괜찮다. 오늘만 살아내면 된다.
돌아보면 나는, 힘들 때는 속박이 무서우리만치 싫어서 늘 밝고 즐겁게 살았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우울을 막기 위한 나만의 예방 치료였는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 밝지 않으면 삶 전체가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웃으며 여기까지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삶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고통조차 지나고 나면 따뜻한 체온으로 남는다는 것. 삶은 어두운 면마저 찬란해서 아름답다. 너무 아프고, 너무 눈부셔서 자꾸만 다시 살아보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사랑한 것만 오래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절함, 그리고 용기.
간절함은 사람을 끝까지 살아 있게 만들고, 용기는 그 간절함을 현실로 끌어오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