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언어가 회복의 지름길
5월 15일 금요일
밤새 요정들이 장난이라도 친 걸까. 두 차례나 달콤한 꿈의 길목에서 길을 잃었으니, 지난밤의 기억이 그리 유쾌한 은빛으로 빛났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엉망인 밤도 아니었다. 상쾌함과 불쾌함 사이 어디쯤을 서성이던 새벽.
참 다행스러운 건, 지나간 밤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시작만큼은 가뿐한 마음으로 반짝이며 눈을 뜰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침은 가볍게 샐러드, 에프에 구워낸 군고구마 반 개를 먹고 오늘은 가뿐하게 병원에 다녀올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 서두를 것 없이 채비를 마쳤다. 나에게 병원은 유일한 외출처다. 거의 시즌권 이용객 수준이다. ㅎㅎ
가끔은 병원 가는 날이 마음이 축 처질 때도 있다. 남들은 약속 잡고 카페 가고 전시 보러 다니는데 나는 주사 맞으러 가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목적지가 있다는 게 좋다. 운동 삼아 밖으로 걸어 나가게 되니까.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갑자기 잠이 비 오듯 쏟아졌다. 차가운 음료를 마셔도 가라앉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몸의 전원이 꺼지는 듯한 졸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한 시간 정도 잠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원장님은 통증과 무기력은 어떤지, 대상포진이 올라왔던 옆구리 상태는 괜찮은지 차례로 물어보셨다. 앞벅지는 꽤 좋아졌고 이제는 옆벅지 쪽만 남았다고, 꼬리뼈 통증은 평소엔 4점 정도지만 눌렀을 때는 6점쯤 된다고 말씀드렸다.
견갑골 가장자리를 짓누르듯 조여 오는 통증은 제법 매웠다. 흔한 담 증상과는 다른, 속에서부터 시큰하게 치받치는 이물감이 있어 덧붙였다.
원장님은 큰 고통이 아닐 때에도 힘들었겠다며 쯧쯧 혀를 차신다. 오래 환자를 봐온 의사 특유의 노련함과 따스함이 묻어나는 몸짓이었다. 아픈 이야기를 하는데도 분위기가 무겁지 않다. 병명이나 증상에 대한 진단명이 아니라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고통을 담담하게 나눈다.
“환자들은 다 비슷해요. 그 고통의 무게를 알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듯 어떤 이야기든 툭 받아 안아주시니 자꾸만 마음을 꺼내놓게 된다.
행복한 진료실은 지금 이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다정한 치유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원장님은 곧장 통증이 시작된 뼈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탐색하시더니 그 자리에 주사를 놓으셨다. 묵직한 자극이 등을 관통하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조임이 탁 풀렸다.
다리 속에서는 얼음줄기가 콰르르 터져 쏟아지는 듯했다. 시원한 물길이 길을 내며 뻗어 나감이 극에 달하자 눈물이 울컥 배어 나와 기분이 좋았다. 꽉 막혀 있던 댐이 터질 때의 압도적인 카타르시스.
온몸의 세포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는데 이 순간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이 맛이지.
나는 언젠가부터 이 공간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는 버릇이 사라졌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언제 어디서든 흘러나오는 쇼츠도 잠시 접어둔다. 대신 지금이 아니면 영영 들을 수 없는 공간의 주파수에 귀를 맞춘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 링거 거치대가 부딪히는 소음,
저 멀리 진료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까지. 그 안에는 유행하는 영상보다 더 생생하고, 도파민으로 번쩍이는 장면보다 훨씬 깊은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환자의 안부를 묻는 찰나의 정적과 호흡은 편집되지 않은 삶의 다큐멘터리 같다. 우연히 흘러나온 귓가를 스친 희망, 전두엽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언어들... 병원의 4층 공간이 통합되면서 더욱 활기로 가득 찼다. 북적북적해서 참 좋았다.
유독 내 귀를 사로잡은 말.
원장님은 한 젊은 남자 환자분께 말씀하고 계셨다.
"뭘 할 때 가장 즐거우세요?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야 치료도, 회복도 빨라집니다. 그래야 병원에 오는 횟수도 줄일 수 있어요."
희망 어린 당부와 숙제를 듣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을 모두 불러 모아 이것 좀 들어보시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몇 년 전, 내가 아파서 길을 잃었을 때 원장님이 나에게 주셨던 처방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원래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성미가 아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투닥일 때, 어린 마음에 큰 싸움으로 번질까 두려워 귀를 기울였던 기억 외에는 타인의 대화에 귀를 세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 신호가 왔음에도 꼭 듣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몇 년 전의 나에게 건네는 말이자, 지금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참았다. 물론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화장실로 향했지만 말이다.
치료를 받으며 몸만 회복하는 게 아니라 나를 믿게 해주는 언어 말에도 기대어 살아간다. 누구에게는 격려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무너진 삶을 잡아주었다. 지금도 그렇다. 약보다 말로 하루를 견딘다. 그런데 또 웃긴 건 그렇게 살아놓고도 다음 날 되면 “아, 나 또 망했네” 하면서 병원 문 열고 들어간다는 거다.
진료실을 나온 그 환자분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년 전의 나처럼 그분도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할 만큼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환자분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저것이 희망이구나.'
언어는 전두엽에 몸을 남긴다. 말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사라지는 진동이 아니다. 뱉은 말, 그리고 내가 들은 아름다운 언어는 뇌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전두엽'과 온몸 세포 구석구석에 그대로 새겨진다. 반대로 상처를 주는 말 역시 몸에 고스란히 남아 삶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나 자신에게 절대로 상처 주는 말을 남겨서는 안 된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뇌 구조를 바꾸고, 삶의 의지를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마음은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답고 위대하다. 의사가 온 마음을 담아 건네는 치유의 언어. 그 언어를 붙잡고 절망 속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내는 환자분의 얼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아픔을 반추하고 타인의 회복을 진심으로 축복해 본다.
일찍이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지던 공간이 놀이터였다면 병원은 이제 내게 다른 의미로 읽힌다.
어둠과 통증이 지배하는 듯한 사이로도 실비처럼 가벼운 웃음과 다정한 안부가 가만가만 흐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이들이 매일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병원은 더 이상 고통만 머무는 음울한 곳이 아니다.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따스한지를 증명하는, 이곳은 내가 가장 아끼는 놀이터다.
물론 놀이터라고 해서 신나게 뛰어놀 체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ㅎㅎ 정작 나는 미끄럼틀 한 번 타기도 전에 방전되는 어린이처럼 좀 살 만하다 싶으면 다시 넉다운된다.
체력이 올라오려나 싶으면 다시 닳아 없어지고 좀 살 만하다 싶으면 또다시 본게임이 시작된다. 고통이 조금 물러가 한숨 돌릴 틈이 생기면 그다음부터는 다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다.
견디는 시간이 끝났다고 삶도 끝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 통제를 벗어났을 때 끝낼 수 있는 선택권이라도 쥐고 있다는 착각.
돌이켜보면 죽고 싶다는 마음이 정말로 삶을 끝내고 싶어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는 못 살겠던 거였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무너져 내렸다.
조금은 느렸지만 차분하고 충만했던 오늘 하루도 이렇게 다정하게 저물어간다.
1. 수면 및 당일 컨디션
새벽 중 2회 각성이 있었으나 (컨디션은 중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기상.
오전 외출 준비 중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통제하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졸음과 무기력감. 음료 섭취로도 호전되지 않아 귀가 후 1시간가량 수면을 취한 뒤 병원 방문.
2. 통증 및 부위별 증상 변화
하지 (허벅지): 앞쪽 허벅지 통증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으며, 현재는 옆쪽 허벅지 부위에만 증상이 남아있음.
꼬리뼈: 통증 점수: 4점
상부 통증은 소실, 안쪽 깊은 곳의 통증 잔존함. 작년만큼의 깊은 통증 양상은 아니지만, 압통(누를 때 통증) 점수는 6점으로 상승.
견갑골 (등): 견갑골 가장자리 부위가 눌리면서 조이는 듯한 통증 지속. 단순 '담'이 걸린 느낌과는 다르며, 최근 시큰거리는 양상이 더해져 관찰 요망.
피부 (가려움증 등): 과거 매일 발생하던 가려움증은 현재 이틀에 한 번 꼴로 발생 빈도가 크게 감소함. (대상포진 관련 특이사항 없음)
*주사 치료+약처방. 지난번 원장님께서 혈액검사를 해보자고 하셔서 시행했고, 소변검사를 받으러 오신 간호사님은 결과를 듣고 가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애매해 다음에 듣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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