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라는 거친 언어를 사랑의 발음으로 고쳐 부르기
2026년 4월 30일 목요일 AM 11:00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왜 자꾸 이유를 찾으려고 들까. 의미?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아픈 건 그냥 아픈 건데. 이유는 없다. 그냥 아픈 거다. 그런데도 머리는 자꾸만 단어를 고르고 논리를 세우려 한다.
그게 더 비참하다. 버티고 있는데 버텨지지가 않는다.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는 오늘의 내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그런데도 그 짓을 멈출 수가 없어서. 모른 채로 있고 싶은데 그러면 죽을 것 같고, 사실은 알아도 죽을 것 같다. 차라리 다 엉망진창으로 섞여버렸으면 좋겠다.
안 찾는다면서 다시 이유를 헤매는 나를 발견한다. 대단한 집착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건 고문이다.
나는 지금 고문당하고 있다. 내가, 나에게.
저녁을 먹고 나서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로션을 바르려고 침대에 앉았다. 그때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다리를 펴려고 했는데, 펴지지 않았다. 원래도 하체에 살집이 많은 편이지만 이건 단순한 붓기가 아니었다.
다리 속에 단단한 무언가를 집어넣고 계속해서 부풀리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피부는 얇아진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매끈해져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살결이 찢어질 것 같고, 다리를 구부리려 하면 통나무를 억지로 꺾는 것 같은 저항이 일었다. 내 다리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남의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기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쥐가 난 것처럼 경련이 지나가고 나서야 겨우 다리를 펼 수 있었다. 작년에는 꼬리뼈만 아팠는데 요즘의 통증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꼬리뼈에서 시작해 골반, 서혜부, 허벅지까지 체인처럼 줄줄이 엮여 당겨진다. 걸음을 떼려 하면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 보이지 않는 끈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움직임이 한 박자씩 늦다.
무기력과 통증의 관계는 여러 요인이 얽혀 있어 항상 1:1은 아니지만 무력감과 통증이 심할 때 적절한 처치를 하면 함께 호전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다.
4월 한 달간 FBT 주사 치료를 7회 했다. 다행히 전신을 덮던 무기력은 늘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다. 이제는 하체 쪽에만 둔중하게 남았다. 전신에서 부분으로 축소되어 거의 다 왔는데 여기만 남았다는 느낌이다. 고통이 묽어지는 순간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과거에 자율신경실조증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극단적인 선택의 끝자락까지 밀려 내려갔을지도 모른다고. 그만큼 당시의 상태가 그림자처럼 깊고 무거웠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통증이 극한까지 치닫지 않아서일까.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으니 오히려 덜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통증은 총량이 아니라 '집중'의 문제인 것 같다. 한 곳에 몰리면 견디기 힘들지만, 흩어지면 그나마 버틸 수 있다. 꼬리뼈가 예민해지면 다른 부위들이 함께 긴장하며 고통을 나눠 갖는다.
몸이 균형을 맞추는 건지, 어쩔 수 없는 반응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곳이 왕창 무너져 내리는 파국만큼은 막아내고 있다.
언제나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마음으로 견디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순간순간 '욱' 하고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분노는 아닌데 배신감, 서운함, 짜증, 당황 같은 것들이 뒤섞인다.
이제는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다. 이쯤이면 익숙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몸은 보란 듯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듯이.
여기까지가 회복이고 여기부터가 다시 무너짐이라고 선을 그으면, 몸은 비웃듯 다른 언어로 반응한다. 경계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흐려지고, 그것을 붙잡으려다 손끝만 지친다.
몸은 설명을 거부하고 이해하기 전에 반응으로 움직인다. 결론은 없고 그냥 존재할 뿐이다.
알 만큼 알았다는 기대와
증상의 어긋남의 간극이 '욱'의 정체였다.
분노라고 부르기엔 방향이 없고, 서운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즉각적이다. 배신감이라기엔 대상이 흐릿하고, 당황이라기엔 너무 깊다.
나는 이것이 감정인 줄 알았는데 충돌이었다. 괜찮아졌다는 과거의 이해와 지금 여기가 이상하다는 현재의 신호가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다 부딪히는 소리. 둘 다 맞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좋아졌다, 나빠졌다, 회복이다, 재발이다... 이 모든 단정적인 생각들은 몸의 경험 앞에서는 너무나 느리고 무력하다.
지금 일어나는 이 느낌을 구획 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있는 것을 분석 가능한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습다. 몸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연속이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난다는 건, 아직 '나'라는 기계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나를 조정하고 있다. 매끄럽지 않아서 당황스럽고 억울하지만 "왜 아직도 이러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이런 질문도 생기지 않는다. 이 모든 '울컥함'은 내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시작과 끝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것은 선이 아니었으니까. 시작점과 종착점을 그리려 할수록 마음만 물에 젖는다. 이해보다 필요한 것은 감각을 따라가는 일이다. 지금 올라오는 것, 지나가는 것, 남아 있는 것을 억지로 잘라내지 않는 것. 지금은 무너짐도 완성도 아니다. 그냥 계속 이어지는 중일뿐이다. 이름 붙이기 전에 흘러가고 있는 나만의 생생한 장면이다.
나는 여러 모양의 고통을 겪으면 바위처럼 단단해질 줄 알았다. 바람을 오래 맞아도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여린 흙이 되어간다. 조금의 비에도 쉽게 젖고, 작은 발자국에도 깊이 파인다. 고통을 이겨내는 법이 아니라, 고통을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그래서 고통 앞에서 자꾸 사랑을 꺼내 든다. 부드럽게, 촘촘하게, 넘치도록 부어 넣는다. 아픈 기억 위에 따뜻한 감정을 덮어버린다. 애정을 쏟아붓고 의미를 덧칠하며, 거칠고 날카로운 고통을 꽃처럼 다듬는다. 피가 맺힌 가시를 꽃잎이라 부르고, 쓰라린 순간들을 저무는 노을의 빛깔로 물들인다.
훗날, 아팠던 기억조차 오래된 명화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게 되기를 바란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면 아리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런 풍경으로 말이다.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듬어 안는 것이다.
아픔이라는 거친 언어를 부드럽고 찬란한 사랑의 발음으로 고쳐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견딘다는 것은 고통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얼마나 넓게 펼쳐낼 수 있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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