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끊어진 나와 다시 연결하기

무력감은 너무 잘 해내고 싶었던 마음이 지쳤을 때 찾아오는 것 같다

by미리나


치료란, 끊어진 나와의 연결을 복구하는 과정이다.





2026년 4월 15일 수요일


작년 5월, 처음 입원했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한 상태다. 당시에는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1시간도 앉아 있기 힘들어서 열차 안에서 계속 자세를 바꿔야만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동안 입퇴원과 통원 치료를 이어왔고 작년 11월 드디어 치료를 마쳤다. 치료가 끝난 이후에도 약 2점 정도의 통증이 남아 있어 마음이 완전히 홀가분하지는 않았지만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무통의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냈다.




치료 막바지에 원장님께서는 통증이 심해지면 2주 후 다시 오라고 하셨지만 가지 않았다. 후회는 없다. 아프면 언제든 오라는 마지막 한마디가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원장님의 말씀이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느꼈던 것 같다. 나처럼 요지부동인 환자를 단 한 번도
귀찮다는 이유로 다른 병원에 전가하지 않으셨다.




치료를 마치고 나는 서울로 올라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무력감에 빠졌다. 통증이 심했던 날, 열까지 나며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이렇게 장시간, 고강도로 이어지는 무력감은 처음이었고 매일 땅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아예 굶기도 했고, 반대로 폭식을 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돼. 몸을 써야 해. 인간은 몸을 쓰는 동물이잖아.”라고 되뇌었지만 현실에서는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버거웠고 집안일도 며칠에 걸쳐 나눠서 겨우 해냈다.


과거와 다른 점은 통증이 덜 하거나 괜찮은 날이 많았다는 것! 그래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당근마켓을 통해 가사 도우미 선생님을 구한 것이다.




나는 외동딸이다. 엄마는 4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아빠는 늘 일로 바쁘시다. 3년 전, 내가 거동조차 못 할 만큼 아팠을 때 아빠는 1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나를 돌봐주셨다. 그 고생과 걱정을 잘 알기에 이제는 아프다는 말도, 입원한다는 소식도 차마 전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 가족을 간병하며 살았는데 막상 내가 간병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니 막막함이 앞섰다. 가까운 절친에게 도 이미 신세를 졌던 터라 더 이상 아픈 기색을 내비치고 싶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누군가 나를 살짝 부축만 해준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몸은 따라주지 않았고 결국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 몸이 아픈 뒤 프리랜서로 바꾸며 지켜온 커리어도, 업체들의 간곡한 요청도 소용없었다. 지금 내게는 내 몸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예전에 열과 심한 통증으로 응급실에 간 게 생각난다. 중증도 분류상 심정지, 호흡곤란, 대량출혈 같은 생명 위협 환자가 우선이기 때문에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안정적이면 순서가 밀린다. 6시간을 대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잠옷 차림의 나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며 ‘덜 아픈 건가’라고 생각했다. 진짜로 아프면 택시를 불러 바닥을 기어서라도 갔을 거라고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실제로는 누워서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고, 바카라을 보거나 패드,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도 어려웠다. 조금만 집중하면 전신의 힘이 빠지며 잠들었고,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에너지를 소모해 기절하듯 힘이 빠졌다. 모든 것이 잠깐씩만 가능했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못마땅해지는 순간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소환했다. 타인과의 비교는 무의미했다. 오로지 무너져 있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대조했다. 밤새 잠 못 들어 괴로움이 수두룩했던 날들에 비하면, 비록 지금이 조금 위태로울지언정 이렇게 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감사한 일임을 안다.







다음 날, 매년 정기적으로 다니는 여성의원에 가서 수액이라도 맞고 싶었지만 옷을 갈아입고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예약은 3분 만에 취소했다.


어플로 가정 방문 진료도 알아보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여러 번 악몽을 꾸었다. 악몽의 강도나 통증, 무력감을 제외하면 작년보다는 나은 상태였지만 신경통인지 알 수 없는 전신 피로와 통증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치료 덕분에 이 정도로 버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우미 선생님은 하루 2시간, 우선 일주일 3회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쓰레기를 버려주시고, 집 앞 마트에서 간단한 식품을 대신 사다 주시는 조건이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시간당 비용은 대부분 2만 원 정도였고, 그 정도가 적당한 수준이었지만 혹시 모를 미안함에 3만 원에 올렸다.





매너 있는 분도 계셨다. 앞에 비속어를 써서 모자이크.




당근마켓으로 모신 도우미 선생님은 의욕이 넘치셨다. 1인 가구의 단출한 살림에 "생각보다 할 일이 없네"라며 멋쩍어하시던 선생님은 세탁기를 돌려주시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이셨다.


의욕이 과했던 탓일까. 콸콸 쏟아부은 세제 덕분에 드럼세탁기 안은 순식간에 거품 파티가 열렸고, 거품을 빼내느라 한참을 애를 먹었다.ㅋㅋ




그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며 적막했던 집에 소란스러운 활기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틀간의 짧은 도움을 끝으로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그 소동 덕분에 잠시나마 병색 깊은 공기를 환기할 수 있었다.


당시 내 마음은 2주 뒤로 다가온 설날에 가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으면서도, 아픈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은 복잡한 마음. 나는 어지간히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꼬박 3개월을 누워 지내는 동안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된 끈은 주치의 선생님의 전화였다. 1~2주에 한두 번,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에게 연락을 돌리시는 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경이로웠다.


어떻게 한 사람의 안부를 이토록 정성껏 살필 수 있을까.



오늘도 나의 통증 탈출 스토리는 계속된다


방금 전까지 통증에 겨워 하염없이 울다가도, 휴대폰 화면에 원장님 성함이 뜨면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씩씩한 척 전화를 받았지만 내 기운을 읽어내셨다.


"목소리가 좋지 않네요. 괜찮으신가요?"


그 한마디에 정말 괜찮아졌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다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시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원장님은 내게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자이자, 삶의 태도를 일깨워주는 스승님이다. 오늘도 '안심'이라는 처방전을 품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2025년 11월 말, 입ㆍ퇴원 후 통원치료를 하고 원장님과 "안녕히 계세요" 하고 돌아섰는데 정신 차려보니 다시 "안녕하세요"다.


진료가 아니라 무슨 출석 체크 같다.ㅎㅎ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회복은 있지만 끝이란 게 어딨어.


병원은 내 인생에 가끔 들르는 편의점 같은 곳이면 어때. 아플 땐 치료받고 괜찮을 땐 살면 되는 거지.


삶은 원래 아프면 좀 기대어 쉬고, 컨디션 좋으면 또 신나게 뛰어가는 거다.


그냥 오늘의 나를 잘 데리고 살아보고 싶다.


마음은 뿌리이고 몸은 그 끝에 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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