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신경실조증, 가려움, 꼬리뼈, 대퇴사두근(앞벅지)

Prologue) 2026년, 내 몸은 또 아프다고 속삭였다

by미리나


2025년 11월 입원+통원 치료를 마치고 2026년 3월 27일 대구로 내려왔다. 그리고 4월 7일 올해 첫 치료를 시작했다.


자율신경실조증, 가려움, 꼬리뼈, 대퇴사두근(앞벅지) 통증으로 현재까지 7일, 10일, 15일 치료받았다.




2년 전,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다발성 통증과 불명열 등 처음 마주했을 때 김정훈 원장님은 사적인 통증 일기를 든든한 격려로 채워주셨다.


“참 잘하고 있어요.”


그 한마디가 아픈 날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3년 전의 나는, 의사들만 모인다는 학회에 원장님이 강연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슨 용기로 그 자리에 가고 싶다고 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지만 그건 객기이면서 신뢰였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더니 원장님이셨기에 가능했다. 환자가 그런다고 아무렇지 않게 데려가 준 호의가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하다.


진료실에서 몇 번이고 권하셨던 통증 일기에 이름을 짓기.


아파 죽겠는데 통증에 이름까지 붙이라니.

이 무슨 고문인가 싶었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대개 애정의 산물이거나,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인 줄 알았다.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이 고통은

짱이 라느니(짜증 나는 통증),

쿡이 라느니(쿡쿡 쑤시는 통증)

이런 귀요미 애칭으로 순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고통에 핑크색 리본을 달아준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지만 적어도 나를 잡아먹으려는 괴물에서 말 안 듣는 강아지 정도로 체급을 낮춰주는 효과는 있었다.


미치겠다고, 돌겠다고 머리를 쥐어짜 봐야 내 손에 잡히는 건 숭덩 빠진 머리카락 몇 가닥과 더 후끈한 두피뿐이다.


1도 좋아지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쥐어박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스트레스라도 풀리면 다행인데 사실 스트레스라는 놈은 배출구가 아니라 저축통장 같은 거라 내가 짜증을 낼수록 이자가 붙어 돌아온다. 비명을 질렀다가 새로운 통증에는 '말랑콩떡'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말랑콩떡이가 다시 내 전두엽에서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네?'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 같겠지만 제정신으로 아픈 것보다는 약간 맛이 간 상태로 귀엽게 아픈 게 가성비 면에서 훨씬 이득이다.


어차피 아플 거라면 비극의 주인공보다는 코미디의 조연이 낫지 않은가. 적어도 관객 한 명(나 자신) 정도는 피식 웃길 수 있으니까. 이게 자주 되지 않아서 문제지만.


내 뇌가 나를 죽이려 들 때, 뇌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응, 그래. 우리 말랑콩떡이 오늘따라 아주 활기차구나. 근데 너도 적당히 하고 좀 자라. 나 내일은 출근해야 하거든.




2023년 11월, 400명의 의사가 모인 학회장. 주치의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고 나는 꽤 많은 것을 얻었다고 믿었다.


의학 용어들이 단숨에 고막에 박힐 리 만무했으니 지식은 아니었고 내 손엔 색깔별 노트와 형형색색의 볼펜들이 들려 있었다.


내용의 체계는 갖추지 못했어도, 적어도 시각적인 겉모습만큼은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팬시점에서 고심해 고른 예쁜 볼펜들을 보며 설레었다.


“나를 바라보고, 기록하고, 정리하며 나만의 체계를 만들기”


그 조언을 즉각 실천에 옮긴 덕분에 지금 내 바카라상 위에는 찬란한 무지개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종이 위에 적힐 생각들은 아직도 가끔은 짙은 흑백이라는 점이다.


그날의 강의는 통증을 '경험'으로, 의사를 치료자가 아닌 '함께 걷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내 마음을 뒤숭숭 흔들어 놓았던 핵심 개념들은 이러했다.





경험 자아: 지금 이 순간 불안, 찰나의 편안함을 느끼는 현재의 나.


기억 자아: 지나간 일을 이야기로 편집하는 나. 고통의 정점(Peak)과 마지막(End)의 느낌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며 "그땐 정말 힘들었어" "그래도 의미 있었어"라고 속삭이는 나.


배경 자아: 자율신경의 긴장도나 삶을 대하는 태도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경험의 바탕에 깔린 기본값.


매 순간을 경험하며 살지만 편집된 '기억'으로 삶을 해석한다.


긴 통증이나 치료가 고되었어도 마지막이 평온했다면 '좋은 치료'로 남고, 내내 순조롭다가도 끝이 좋지 않으면 '악몽 같은 하루'로 저장되듯이 말이다.


경험하는 나, 글로 풀어내는 나, 그리고 '행복한 환자'로서의 배경을 가진 나. 이 세 명의 자아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돌아갈 때 나의 진정한 회복 서사가 완성된다고 믿게 되었다.





사실 2023년 11월 말, 그날 새벽 6시, 동대구역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에서부터 학회장까지 내내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시큰하고 뻑적지근하게 뒷덜미를 타고 흐르던 그 기분 나쁜 통증. 어떻게든 한 단어라도 더 담으려 애썼던 나와 그날의 뜨거웠던 공기가 지금의 나를 빚어냈다.


세세한 이론은 희미해졌다. 기억을 하려 해도 잘 나지 않는다. 병원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봐도 그때만큼 절실하게 와닿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90분의 시간을 위해 3년을 고뇌하며 의료와 삶으로 엮어 내신 원장님의 모습만은 뇌리에 진하게 남았다.


요즘은 이름조차 붙이기 싫은 고통을 기록할 때도 있다. 나는 오늘도 무지개색 노트를 펼친다. 흑백의 생각들이 언젠가는 이 찬란한 색감에 또다시 물들기를 바라며.



2025년 5월부터 11월까지, 내 꼬리뼈는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했다. 겨우 잠재웠던 자율신경실조증까지 눈치 없이 다시 찾아왔다. 네 번의 입원과 수십 번의 외래 진료를 반복하며 굴욕적인 통증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고통스럽다, 답답하다, 짜증 난다, 도망치고 싶다,


뾰족한 송곳이 찌르는 것 같은 통증, 8점.”


유치한 기록이 왜 내 삶의 필살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고통을 관찰하고 이름을 붙이면 ‘아파서 미치겠는 나’에서 ‘아픔을 지켜보는 나’로 교묘하게 분리되었다.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겁쟁이의 위대한 뒷걸음질.


그날 이후, 내 통증 일기는 단 하루도 멈춘 적이 없다. 고상한 기록 문학이 아니라 나를 살피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다정한 가스라이팅(?)에 넘어가 주는 나만의 생존 의식이다.


이제 내 통증들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고 덕분에 한 침대에 누워서도 딴청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배설하듯 쏟아낸 SNS의 문장들을 당신이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감동보다는, '아차'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장마다 향수라도 뿌려둘걸. 필터 없이 널브러진 내 감정의 민낯을 들킨 기분은 간지럽고도 쓰리지만 괜찮다. 그 날것들이 지금의 나를 겨우 지탱하는 뼈대가 되었으니.


통증 일기 숙제를 나에게만 내주신 줄 알았더니, 당신도 나라는 복잡한 환자를 꼼꼼히 기록하고 계셨다.



2026년 4월 8일 내게 보내주신 자료










당신은 환자 한 명의 우주를 다 들어주느라 대기실을 '눈물 대기소'로 만들어버린다. 초진에 30분을 쏟아붓는 그 정성 탓에,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은 각자의 슬픔을 예열하다 결국 휴지 몇 칸에 무너지고 만다.


나라고 별수 있겠나. 요즘도 가끔 습관처럼 휴지를 뜯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를 내 안의 비겁한 통증과 눈물을 급히 틀어막기 위해서.


좌충우돌하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통증과 나란히 앉아 마주 볼 여유가 생겼다. 물론 그것이 견딜만한 '적당히 매운맛'이라는 전제하에. 거대한 고통이 파도처럼 덮칠 때면, 나는 여전히 속수무바카라으로 무너진다. 초연함과 절망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강해졌으나 동시에 한없이 여린, 지금 내 모습 그대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잔소리가 유독 많은 사람들을 보면 '본인은 얼마나 완벽하게 지키고 있길래?' 하는 짓궂은 궁금증. 주치의 선생님도 그러셨다. 나를 향해 쏟아내던 다정하고도 따가운 무수한 잔소리들. 돌아보니 그 잔소리를 들을 만한 구석이 내게도 분명히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잔소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함께 가고 있다는 든든한 동행의 말이었다. 당신도 모니터 앞에 나와 같은 무게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니. 그 따뜻한 잔소리에 실린 진심을 확인한 순간 나의 통증 일기는 비로소 혼자만의 앓는 소리가 아닌 둘의 합창이 되었다.




지금 간단한 운동도 못하겠다고 하자, 맨발 걷기를 해보라고 권유하셨을 때는 현관문 너머의 세상이 아득한 섬처럼 보일 때 나가지 않고 세상을 방 안으로 들였다.


안 나가기 위한 꼼수로 구입한 것은 지압 매트였다. 발바닥을 파고드는 인공 돌기 위에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걷는 셈이지.'


원장님께 맨발 걷기 한다고 말씀드리니 그것은 접지(Earthing)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고 바로 당근마켓에 팔았다. 거의 새것, 사용감 있음.




갑자기 없던 용기가 나서 당장 밖에 나가 걸었다. 처음에는 발바닥에 닿는 흙의 질감이 낯설어 주춤거렸고 작은 자갈에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차츰 대지의 온기가 발끝을 타고 심장으로 올라오는 감각에 중독되어 갔다. 매트 위에서의 고통은 참아내는 것'이었으나 흙길 위에서의 자극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돌기에 의지하지 않는다.


맨린이 시절의 두려움을 벗어던진 지 3년 차다.


나가지 않으려 애쓰던 좁은 방은 이제 없다.


세상 모든 길이 나만의 매트가 되었으니까.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데도 늘 읽어주시고 댓글로 많은 응원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한 분 한 분 일일이 댓글을 달아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치료는 때로 지루하리만큼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드문드문 맥이 끊기기도 합니다. 그 굴곡진 시간 속에서 마주하는 찰나의 감정들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늘 굴뚝같았습니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다가는 또 한 해를 흘려보낼 것 같아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두 개의 연재를 동시에 시작해 보려 합니다.


사실 그날그날의 뜨거운 감정들은 혹여 누가 볼까 두려워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진 곳에 숨어 적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숨겨둔 마음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보려 합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가장 솔직한 온도 그대로요.




주치의 선생님의 큰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부족하지만 제 글을 통해 단 한 분이라도 좋아지시고 용기를 얻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글은 요일에 구애받지 않고,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이어갈 예정입니다.


늘 언급했듯이, 저는 환자일 뿐 병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모든 치료 내용과 주치의 선생님이자, 행복한 H병원 김정훈 병원장님의 초상권 및 저작권은 동의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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