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는 기억이 넓은 강물 같았다
가끔 만나서 맛난 걸 먹고 수다를 하는 모임이 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러 사람 중 한 사람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다. 생각 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 앉은 이가 슬며시 묻는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한다. 나는 깜짝 놀라 내 감정을 추스르고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고는 방끗 웃음을 보였다. 사실은 그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머릿속을 헤매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실 때까지도 생각나지 않던 이름은 휴대전화 연락처를 하나하나 훑어본 뒤에야 겨우 알아차렸다.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익숙한 단어가 생각 끝에서 맴돌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의 이름이 불현듯 사라지는 경험은 좀 당혹스럽다. 혹시 치매의 시작은 아니겠지? 걱정도 스친다. 그러나 조금만 둘러보면 이런 일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일 것이다.
젊을 때는 기억이 마치 넓은 강물 같았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오래 기억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강물도 조금씩 얕아지고 물길도 바뀐다. 그런데 예전처럼 빠르게 흐르지는 않지만 대신 천천히 굽이치며 더 조용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기억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삶은 단순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한다. 봄날이 아무리 화려해도 끝내 꽃잎을 떨구고, 검푸른 여름 푸르름은 가을이면 그 빛을 내려놓는다. 하늘에 있는 별조차 언젠가는 그 빛을 다해 새로운 우주의 재료가 되듯 말이다.
사람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많은 정신과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력을 지키는 좋은 방법으로 규칙적인 운동과 글쓰기를 꼽는다. 몸을 움직이면 근육만 단련되는 것이 아니라 뇌도 함께 깨어난다고. 걷고, 가볍게 뛰고, 계단을 오르고 심장이 힘차게 뛰는 동안 뇌의 신경세포도 활기를 되찾는다고. 그리고 읽고 쓰고 기억해 내는 습관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잃어가는 시간이고 또 비워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기 위해 삶이 스스로 짐을 덜어내는 과정. 기억의 서랍이 조금 헐거워지는 대신 사람을 더 이해하는 시간. 더 다소곳해지고, 말이 줄어들어드는 시간.
누군가의 이름 하나를 잊었다고 해서 삶이 확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 인간이 얼마나 자연에 가까운 존재인지 새삼 알게 되는 시간일 것이다. 꽃이 시드는 일을 슬퍼하면서도 봄을 기다리듯, 기억이 더디게 떠오르는 것은 여전히 모두가 가는 그 지점을 향해 걸어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억은 지금보다 더 천천히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계절이 늦게 와도 반드시 오듯, 내 삶도 서두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기억해 내는 것보다 얼마나 따뜻하게 살아냈느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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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를 신고 틈틈이 내가 좋아하는 안양천 길을 걷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몸을 움직이며 기억을 깨우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삶을 사랑하기 위해. 시간은 나에게 많은 것을 덜어내겠지만, 그 대신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지혜를 남겨준다. 그 지혜가 있는 한, 기억이 조금 머뭇거리더라도 그 마저도 내 인생의 한 장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