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무엇일까

by현월안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고 말한다. 오래전 가수 멜라니 사프카는 노래 '가장 슬픈 것(The Saddest Thing)'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을 고하는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고 고백한다. 어쩌면 죽음과 이별은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오래된 슬픔이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 또 곁을 지키던 반려동물이 눈을 감는 일. 그 상실의 순간은 마음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목동역 번화가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며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그의 손에는 여전히 딸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십수 년째 이어지는 기다림은 단순한 슬픔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절망 사이를 오가는 긴 시간, 어쩌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깊은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어떤 축구 선수는 결승 경기에서 패배한 뒤 '선수 생활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는 경기의 패배가, 누군가에게는 꿈의 좌절이 가장 큰 슬픔이 될 수 있다. 슬픔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비를 맞아도 누구는 우산을 찾고 누구는 하늘을 올려다보듯, 슬픔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나는 슬픔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며칠 전 중요한 물건 하나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온 집안을 뒤지고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가 엉뚱한 곳에서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웃어넘겼을 일이지만 문득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기억이라는 것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망각을 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만약 인간이 모든 상처와 고통을 잊지 못한다면 삶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실연의 아픔도 실패의 쓰라림도, 누군가의 배신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기에 또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망각에는 또 다른 의미다. 고통뿐 아니라 아름다운 기억마저 함께 가져간다는 사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의 기억과 엄마가 차려주던 저녁 밥상의 온기, 첫사랑의 가슴 떨림과 또 아이의 작은 손을 처음 잡았던 순간. 수많은 기억들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장면들이다. 삶은 기억의 시간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쩌면 망각은 단순히 기억을 잃는 일이 아니다. 조금씩 나를 잃어가는 일이다. 어느 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내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평생 쌓아온 추억들이 안개처럼 흩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몸이 늙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어쩌면 마음의 풍경이 사라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을 기억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 창고가 아닌 기억은 나의 정체성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연결되는 이유도 기억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매일 처음 태어난 사람처럼 세상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글쓰기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젊은 날에는 기록이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적고 또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글쓰기는 조금 다르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다. 오늘 창밖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친구와 나눈 짧은 대화, 우연히 떠오른 추억 하나를 적어두는 것은 언젠가 잃어버릴지 모르는 나를 위한 작은 의식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기록한다. 기쁜 일도 쓰고 슬픈 일도 적는다. 때로는 별것 아닌 일상도 꼼꼼히 남겨둔다.

아침에 마신 커피의 향기, 시장 골목에서 만난 사람의 웃음, 딸아이가 건네준 작은 그림 한 장까지도.

그 순간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소중한 의미가 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았다는 증거,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는 의미, 웃고 울며 한 시대를 통과했다는 증거 말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젊음도 기억도 조금씩 멀어진다. 또 언젠가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록된 기억은 다시 찾아온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쳤을 때 잊고 있던 계절이 되살아나고, 빛바랜 사진 한 장 속에서 잊었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어쩌면 인생은 기억을 모으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록은 그 여행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꿈일 수도 있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슬픔은 내가 나를 잊어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열심히 글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기억이 희미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 문장들이 조용히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인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