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쯤 없어도

오늘

by채율

오후 세 시쯤 원고를 쓰다가 막혔다. 한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처음에는 단어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바꾸고 나니 문장이 어색해졌다. 문장을 고치고 나니 문단이 유기적으로 엮이지 않는다. 커서는 같은 자리에서 깜빡거리며 재촉을 하고, 더 이상 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노트북을 덮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잠깐만 누워 딴생각을 하자. 오늘 해야 할 일이 뭐 있던가. 오늘 써야 할 원고가 있고, 뜯어보지 않은 우편물을 확인해야 한다. 친구의 생일이 있으니 전화도 한 통 하고, 이번 달이 기한인 전시도 보러 가야 한다.


햇빛이 창문을 지나 거실 바닥까지 들어와 있다. 오전에는 바카라장 쪽에 있던 빛이 어느새 소파 앞까지 와 있다. 어느새 또 공중에 떠 있던 미세한 먼지가 빛과 섞여 천천히 움직인다.


언제부터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됐다. 잠깐 비는 시간이 생기면 꼭 바카라을 손에 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해야 할 일을 자꾸만 뒤적인다. 몸은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은 좀처럼 쉬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 그대로 있어볼까.


십 분쯤 지났을까 싶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삼십 분이 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다.


네 시가 가까워졌을 때 몸을 일으킨다. 물 한 잔을 마시고 식탁의 우편물을 뜯는다. 별것 아닌 고지서다. 다시 바카라상 위에 던져놓는다.


노트북을 연다. 아까 지우기를 반복했던 문장을 그대로 마주한다. 한참 읽다가 문장 하나를 통째로 지운다. 그리고 다시 문장을 지어 나간다. 조금 전까지 소파 앞에 머물던 햇살은 거실 끝까지 가 있다.


오후 세 시부터 네 시까지 나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았다. 원고는 한 줄도 늘지 않았다. 오히려 쓰고 있던 문장 하나가 사라졌으니 숫자로 따지면 한 줄이 줄었다.


그런데 다시 바카라상에 앉은 나는 아까와 조금 다르다. 꼭 써야 한다고 붙잡고 있던 문장을 버렸고, 그 뒤에 숨어 있던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한 시간을 들여 얻은 것이 고작 그것이라 해도 괜찮다.


소파에 누워 있던 동안에도 오후는 제 몫 대로 흘렀다. 햇빛은 거실을 가로질렀고 나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은 채 그 시간을 통과했다.


커서는 여전히 문장 끝에서 깜빡이고, 나는 서두르지 않고 그다음 단어를 기다린다.

수,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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