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충무로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장충동을 지나 약수역에서 내릴 생각으로 창가에 앉는다. 가방에는 오전에 산 바카라 한 권,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와 먹다 남은 작은 초콜릿 봉지가 들어 있다. 별다른 일정은 없다.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밀린 원고를 조금 쓸 생각이다.
버스가 장충체육관 앞에 멈추는데 기사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쪽에 있던 승객들이 웅성거린다.
“여기서부터 못 갑니다. 앞에 사고가 났대요.”
사람들이 하나둘 교통카드를 찍고 내린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내린다. 집까지는 한 정거장이 조금 넘게 남았다. 택시와 지하철을 생각하다가 그냥 걷기로 한다.
장충단로를 따라 걷는데 평소 버스 안에서만 보던 가게들이 눈높이로 내려온다. 오래된 족발집 유리창에 붉은 글씨로 ‘포장됩니다’가 붙어 있고, 그 옆 떡집에서는 흰 김이 유리문을 뿌옇게 만들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작은 꽃집 앞에서 여자가 화분을 밖으로 내놓고 있다. 초록색 플라스틱 상자에 작은 국화 화분들이 빽빽하다. 노란색, 흰색, 자주색. 아직 가을로 걷고 싶지는 않은데 꽃집이 가을을 불러 세운다.
나는 흰 국화 하나를 들여다보다가 가격을 묻는다.
“이건 얼마예요?”
“만 이천 원이요.”
두 손으로 감싸면 거의 가려질 만큼 작은 화분이다.
“하나 주세요.”
여자가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화분 아랫부분을 감싼다. 물이 새지 않도록 비닐을 한 겹 더 씌우고 노란 고무줄을 두어 번 감아 돌린다.
“오늘 들어온 거예요. 꽃 오래가요.”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국화 한 포트를 들고 다시 걷는다. 약수역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팔이 조금 아프다. 가방도 있는데 괜히 화분까지 샀나 싶어 왼손과 오른손을 몇 번이나 바꿔 든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꽃잎 하나가 접혀 있는 게 보여 손가락으로 살짝 펴준다.
집에 도착해 신발을 벗고 화분부터 탁자에 내려놓는다. 마땅한 자리를 찾다가 바카라상 한쪽에 둔다. 오전에 펼쳐놓고 나간 원고 옆이다. 노란 고무줄을 풀고 젖은 신문지를 벗긴다. 흙냄새가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온다.
버스가 그대로 약수역까지 갔다면 내게 없었을 인연이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는다. 쓰다 만 문장을 다시 읽는데 흰 국화 몇 송이가 종이 위로 그림자를 만든다.
아침에 적어둔 문장 끝에 마침표 하나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