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위. 돛대의 끈을 묶던 남자가 어디 가냐는 질문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을 자랑하며 답한다. 하얀 천이랑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뭇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아직도 회자되는 꽃보다 남자 지후 선배의 명대사다.
낭만 가득한 야장 한복판. 술잔을 기울이는 청춘들 사이에 자리 잡은 여자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동행인은 놓치지 않고 희극 속 비극을 포착한다. 노트북만 있다면 작가는 어디서든 일할 수 있어. 어느 날의 나를 보는 듯하여 공감의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 후배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다.
첫 등장 때의 열기는 사그라졌지만 그래도 스테디로 자리 잡은 왓츠 인 마이 백 콘텐츠를 종종 찾아본다. 복조리만 한 사이즈의 가방에 야무지게 여러 아이템을 수납한 걸 보면 마음이 동한다. 가격도 착하고 디자인도 휘뚜루마뚜루 여기저기 들고 다니기 적당해 보여서 안 살 이유가 없다. 자체 합리화를 하며 장바구니에 넣으려던 차에 손가락이 찜 버튼 언저리에서 머뭇거린다. 조금 작긴 해. 살짝만 더 크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바카라이랑 다이어리 한 권 씩은 들어갔으면 좋겠고 ‘그것’도 들어가야지. 결국 이튿날 현관문 앞에 도착하는 택배 상자 속 정체는 큼지막한 쇼퍼백이다.
작가들은 대개 짐이 많다. 사실 작가뿐만이 아니라 콘텐츠 제작 스태프들에게는 두루 적용되는 이야기일 텐데 촬영에 필요한 자잘한 물건들을 챙기다 보면 보따리장수가 될 수밖에 없다. 나한테 필요한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선배들이 필요로 할 법한 것들까지 모두 챙긴다. 찾는 즉시 대령해야 할 의무가 있거든.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카지노톡으로 이루어져 단톡방은 24시간 돌아가며, 실시간으로 촬영 내용을 기록할 때도 핸드폰 메모장을 애용하는 등 핸드폰을 달고 사는 만큼 보조 배터리는 필수인데 요즘에는 컴팩트한 대용량 보조 배터리도 많이 출시됐지만 예전에는 정말이지 벽돌을 들고 다녔다. 어떻게 잘 좀 욱여넣으면 작은 가방으로도 해결되지 않냐고? 어림없는 소리. ‘그것’이 들어가야 해서 꿈도 못 꾼다. 출퇴근이 자유롭고(출퇴근 없이 그냥 계속 일한다는 뜻이다) 포장만 보면 디지털 노마드인(어디서든 예고 없이 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의 생존템이자 분신템인 노트북 말이다.
보통 온라인 게임인들은 회사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업무용 노트북이 필요한 경우 사측에서 제공받기도 하던데 프리랜서인 작가에게는 당연히 해당하지 않는 사안이고 모두 개인 노트북을 사용한다. 나는 어쩌다 보니 노트북 두 대에 집에 데스크탑까지 있어서 웬만한 파일들을 드라이브에 연동시켜 놓으면 노트북을 사무실에 두고 다녀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노트북 한 대로 연명하는 작가들, 특히 막내 작가들은 노트북일체가 된다. 물론 난 인생의 20%를 대중교통에서 보내는 경기도인이자 불안병 말기인 만큼 이동 중에 작업 요청이 들어올지도 몰라 웬만하면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아무리 초경량을 내세워도 매번 지참하기에는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닌 노트북을 이고 지고 다니는 이유? 사무실에서야 당연하고 현장에서도 실시간으로 촬영 내용을 반영하여 문서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촬영, 편집, 방송 스케줄이 겹칠 경우 인력 부족으로 촬영장으로 향했다가 현장에서 급하게 다른 작업에 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일할 때의 이야기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정확히는 감수해야만 한다). 휴일에 약속을 잡아도 작가 친구들은 어김없이 최소 A4 사이즈의 가방과 함께 등장한다. 물어보면 그 안에는 십중팔구 노트북이 들어있다. 바쁜데 불러낸 거 아닌가 싶어 물어보면 이번에도 열에 아홉은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혹시 몰라서.” 혹시는 꼭 역시로 바뀐다. 커피를 마시다가, 밥을 먹다가, 술을 들이켜다가 느닷없이 노트북을 꺼내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도 그리고 함께 만나는 친구들도. 작가들이 모이면 어디든 상암 한복판이 된다.
요즘에는 스마트폰 하나로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인데 아니,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합니까? 물으신다면 나 또한 “노트북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막내 때야 당연히 노트북과 한 몸이었지만 연차 좀 먹고 나서는 스마트폰 하나만 덜렁 들고 나가는 패기를 시전, 작업 중인 모든 파일을 클라우드에 넣어두는 걸로 모자라 접속해서 다운받는 수고를 덜고자 나와의 카톡방에도 모조리 보내놓고 연락이 오는 족족 곧장 포워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세상사가 이렇게 희망회로 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꼬. 연락이 오고 답장을 하면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자료를 수정한다든지 추가 자료를 요청한다든지 등등. 배우 박정민 씨가 문인들은 한컴 오피스를 쓴다고 말했듯 나름 작가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우리도 한컴 오피스 외길을 걸어서 핸드폰으로 뭔가를 작업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인정하기 싫지만 나 역시 옛날 사람인지라 자그마한 화면으로 토독토독 자료를 찾자니 그냥 어깨 하나 희생하더라도 들고 나온 노트북을 펼쳐서 큼직한 화면으로 빨리 찾고 빨리 수정하고 빨리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편이 낫다. 감히 노트북을 들고나오지 않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짧은 만큼 밀도 높은 일정을 자랑했던 프로그램을 하면서 친해진 동료 작가들과 뒤풀이를 가지기로 했다. 마지막 촬영에 마지막 방송까지 막을 내리고 제작진 단톡방에서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짠짠짠! 랜선 건배를 외친 다음 날이었다.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작은 가방을 들고나오는 사치를 부렸다. 얼마 만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나오는 외출이람.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아니지, 안 되지. 이거 아니야. 이제 영업 종료해야 할 단톡방에 피디님이 왜 톡을 보내는 건데.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 잠금을 해제하자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나를 반겼다. [비하인드 영상 팀 메일로 보냈습니다. 자막 부탁드려요.]
“리수야.”
동시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동료 작가였다. 아마 내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마지막 회가 나갔고 훈훈한 격려 인사도 나눴다. 무엇보다 비하인드 영상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을 거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자막 작업이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오늘 약속을 잡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 도착한 후배 작가를 포함해 도합 노트북 0대인 우리 셋은 머리를 맞댔다. 자막을 쓸 수 없는 우리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자 한 표, 누구도 추가 자막 작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셋 다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분명히 한 소리 들을 테니 어떻게 해서든 자막을 써야 한다 한 표, 모르겠고 방송국을 폭파하자 한 표. 치열한 무승부를 기록하는 가운데 이러고 있을 시간에 1분이라도 썼겠다며 우리는 아쌉하게 해치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길로 끝내주는 점심을 먹을 예정은 PC방 찾아 삼만리로 전격 변신. 한국은 분명 PC방의 민족이었는데 심심할 만하면 등장하던 PC방이 그날따라 왜 이리 보이지 않든지. 겨우 찾아 들어간 PC방은 야, 저런! 똑바로 하라고!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육두문자가 난무했다. 와중에 너무나 억울해서 첫 방문 할인쿠폰을 받기 위해 PC방 회원가입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이 웃프기만 했다.
무조건 한 시간 안에 끝내는 거야, 오케이? 천 원 이상의 노동은 할애하지 않겠어. 딸깍딸깍 누구 하나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세상 험상궂은 표정을 장착한 채, 딸깍딸깍 세상 요란하고 현란한 키감을 뽐내는 키보드를 부술 기세로 내리치는 와중에 손끝에 실린 분노에서 탄생하는 자막은 세상 귀염뽀짝. 으레 걸작은 헝그리 정신에서 탄생하듯 앵그리 정신으로 우리는 기어이 종료 시각 5분을 남겨 놓고 작업을 끝냈다.
하얗게 불태운 후의 기억은 깜깜하다. 뒤풀이 겸 속풀이를 하려고 모였으니 밥을 먹든 술을 먹든 뭔가는 입에 넣었을 텐데 그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낸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넋 나간 채 카페 한 구석에 찌그러져 관성처럼 카페인만 들이붓는 장면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래도 종국에는 웃었던 듯하다. 이 프로그램은 마지막까지 에피소드가 가득하다면서.
이 웃픈 경험 이후 나는 방송일 자체를 쉬는 상태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노트북을 들고 나간다. 노트북이 있든 없든 일을 해야 한다면 있는 게 낫다. 요즘에는 그래도 태블릿 PC 잘 되어 있는 편이라 어깨 사정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어깨의 무게는 부담이자 스트레스지만 어쨌든 일종의 바카라임감과 감사하게도 프리랜서인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방송 관련해서 드문드문 작업하는 일도 재택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소일거리라 외출할 때도 별 부담이 없지만 때로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그리워진다. 저 잠깐 일 좀 할게요. 대화 도중 말을 끊고 카지노톡에 집중하거나 노트북을 펼치는 친구들을 오도카니 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꽤 오랜 공백을 보내고 있는 지금, 방송으로의 복귀가 언제쯤 성사될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다. 평일이고 휴일이고 가릴 것 없이 묵직한 가방을 들고 다니며 이 글을 다시 읽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노트북이 있든 없든 어디서든 일해야 하는 게 작가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하고 고개를 끄덕일까? 아니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써 놨네. 이게 네가 바랐던 일상이냐! 과거의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찰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미래의 나에게 한 마디만은 남겨두고 싶다. 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는 나름대로 진심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