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평판이 천리 간다

by리수


한창 이력서를 넣느라 바빴던 어느 날. 언젠가 함께 일했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에 이력서 돌려?”


혹시 내 연차를 구하면 알려주십사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구직 활동을 하던 터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이 바닥이 좁아도 정말 좁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다.


최근 일부 외국계 기업에서 활용하던 레퍼런스 체크가 중견 기업 사이에서도 보편화되는 추세라고 들었다. 레퍼런스 체크란 채용 후보자의 이전 근무처에서 성과나 인성, 조직 생활 등을 확인하는 채용 절차인데 한마디로 평판 조회다. 서류에 면접까지 뚫었는데 넘을 산이 하나 더 생긴 격이라 새롭게 등장한 시스템이 구직자들에게는 꽤 심적 부담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불만을 토로하는 글들을 보면서 남 일 인양 바라봤다. 신기했다. 우리는 그게 디폴트니까. 레퍼런스 체크라는 고오급진 표현 대신 뒷조사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


정식 레퍼런스 체크는 법에 따라 사전 동의와 정해진 절차를 거치지만 우리의 평판 조회는 역시나 법망 밖에 있다. 내가 이력서를 넣었다는 걸 알리지도 않았는데 선배가 먼저 알고 연락한 것처럼 당사자는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가 오간다. 별도의 동의 절차는커녕 내가 지금 평판 조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지원서 하나 넣었을 뿐인데 어둠의 비공개 오디션이 펼쳐진다.


방송 작가의 구인구직은 대부분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진행되는데, 먼저 자신이 아는 선후배와 동료 가운데 적임자를 찾고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그들이 아는 또 다른 사람에게 연락한다. 여기서도 성에 차지 않으면 일명 ‘천 명 방’이라고 불리는 작가 구인구직 단톡방(지금은 입장 가능 인원이 삼천 명으로 늘어나 삼천 명 방이 됐다)에 공개적으로 공고를 올린다. 지인이야 원래 알던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일면식 없던 지원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고 어떻게 거를까.


케빈 베이커의 6단계 법칙. 세상 모든 사람은 최대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방송 업계에서는 여섯 다리까지도 필요 없다. 세 다리만 거치면 웬만한 사람에게 도달한다.


이력서에는 당연히 지금까지 참여한 프로그램을 기재한다. 앞서 말했듯 두세 다리만 거치면 해당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사람을 찾는 건 문제도 아니다. 내 경우 방송 아카데미 동기 단톡방에 도움을 청하면 서른 명에 달하는 동기들에게서 정보망이 또 뻗어나간다. 나 역시 동기들이 막내 작가를 구할 때 연락을 더러 받았다. 내 평가 하나로 당락이 결정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판단에 0.01%라도 영향을 미친다는 건 부정하지 못한다. 웬만하면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얼굴 붉히며 헤어지는 일은 만들지 않으려는 이유다.


평판과 평가라는 게 애초에 주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업무 능력을 이야기하다가도 어느 순간 개인적인 호불호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결정권을 쥔 연차 높은 작가들만 좋은 거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천만의 말씀. 후배 작가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이쪽은 아예 문서로 남긴다. 막내 작가 타이틀을 달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나도 기회가 생기는 족족 열람해 보는 최고 등급 기밀문서. 바로 작가 블랙리스트다.


막내 작가들이 십시일반으로 하나둘 정보를 추가해 만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이름과 참여했던 프로그램, 그리고 짤막한 설명으로 구성되는데 그 설명이 레퍼런스 체크처럼 체계적이거나 공적인 워딩이 아니기는 하다. 업무 성과나 전문성을 평가하기보다는 아랫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 됨됨이를 기록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달까. 실제로 리스트에 적힌 사유를 보면 아주 자유분방하다.


- 미혼에 친구도 없어서 일 없는데도 밤 11시까지 잡아둠

- 가스라이팅과 수동 공격의 권위자

- 후배가 한 일 가로채서 자기가 한 것마냥 꺼드럭


일 힘든 건 참아도 사람 힘든 건 못 참는다는 온라인 게임인 명언도 있는 만큼 어쩌다 이런 사유가 비롯됐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내가 봤던 설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감자튀김 빌런’인데, 정말 달랑 이 여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도대체 감자튀김과 관련하여 어떤 잔혹한 내막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섯 글자에 꾹꾹 눌러 담은 울분만큼은 느껴졌다. 맑은 눈의 광인이 무섭다고 구구절절 설명보다 심상치 않은 별명 하나의 임팩트가 더 센 법이다.


유감스럽게도 방송 업계는 프로그램을 런칭할 때마다 팀 또한 새로 꾸려지는 경우가 많고,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짐해도 다른 현장에서 재회하기 일쑤다. 수요 없는 시즌2의 시작. 그러니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합리한 상황을 참는 사람도 많다. 블랙리스트가 생겨난 배경에는 그런 경험들이 두텁게 쌓여 있을 거다.


요즘에는 아예 막내 작가만 입장할 수 있는 대나무숲 오픈채팅방도 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가 작가계의 잡플래닛 후기라면 막내 작가 오픈채팅방은 작가계의 블라인드인 셈. 한 자리가 비기 무섭게 공석이 채워지는 방이라 입장부터 하늘의 별 따기다. 아마 인증 같은 절차도 거치는 모양인데 나도 실제로 들어가 본 적은 없어서 진실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갈까. 막내 작가를 졸업한 지 오래된 나로서는 궁금하면서도 무섭다. 나도 빌런 등극해서 화살 맞고 있는 거 아니야?!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저 감정의 진흙탕 싸움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실제로 개인적인 감정을 업무 평가인 양 둔갑시킬 가능성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까다로운 상사가 나에게는 꼼꼼한 선배이고, 나에게는 융통성 있는 후배가 누군가에게는 칠칠치 못한 후배가 된다. 그렇다고 평판을 공유하는 문화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본다. 나름 건강한 상호 견제 장치로 포장할 수 있거든. 나 역시 과거에 고질적인 우울증을 선물한 팀을 거쳤고, 면접 자리에서부터 인격 모독에 가까운 말을 들었다는 주변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접하다 보면 물밑에서나마 레드카드를 날리는 일이 얼마나 기꺼운지 모른다.


업무 소화 능력이나 성과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인격이다. 선배들의 은밀한 뒷조사든 막내들의 피땀 눈물이 어린 블랙리스트든 아니꼽게만 여길 게 아니라 나부터 되돌아보는 경각심으로 삼으면 어떨까. 사실 찔리는 게 없는 사람은 뒤에서 무슨 말이 오가든 걱정하지 않는다.


좁디좁은 바닥에서 우리는 언젠가 또 만난다. 나 역시 누군가의 이력서를 보며 “이 친구 어때?” 묻는 연차가 되었고 동시에 블랙리스트에 오르내릴 수 있는 위치가 됐다. 부디 어딘가에서 내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때 감자튀김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한, 이왕이면 긍정적인 이유로 기억되기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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