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매가 쇼핑을 할 때면 100%의 확률로 등장하는 말버릇이 있다. 언니는 “마실용으로 딱이군.”, “외출용 옷이 필요한데.”를 입에 달고 다닌다. 마실이 외출 아니야? 다르지. 뭐가 달라? 마실은 동네 산바카라 가는 거고 외출은 핫플 놀러 가는 거지. 그럼 핫플로 산바카라 가면 뭐 입을 거야? 여기까지 딴지를 걸고넘어지면 언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출근용도 하나 사야 돼.” 그러니까 출근도 외출…. 기어이 정색을 곁들인 야, 소리가 튀어나오면 언니 놀리기에 도가 튼 나도 눈치를 봐야 한다, 큼큼. 시선을 피하고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씩 넘기다 보면 드디어 내 눈에도 마음에 드는 옷 몇 벌이 들어온다. 그리고,
“촬영용으로 합격.”
이게 바로 내 말버릇이다.
출근 복장과 사복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온라인 게임인은 비단 언니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이지. 아무래도 누추한 회사에 귀한 옷을 입고 가기는 그렇잖아. 우스갯소리는 차치하고 회사에는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복장 규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금융권처럼 신뢰가 중시되어 복장 규정이 엄격했던 업계도 복장 자율화를 시행했지만 여전히 근무 기강을 고려해 눈치껏 비즈니스 캐주얼 정도는 갖춰 입어야 하는 곳이 많다. 언니의 전 온라인 게임에서는 단화는 허용하되 끈 달린 운동화는 금지였는데 하루는 후배가 투박한 어글리 슈즈를 신고 오자 상사가 지나가면서 흘끗 곁눈질 하더니 “오늘 신발이 참 화려해?” 하고 아닌 척 핀잔을 날렸다고 했다. 운동화를 신으면 실적이 나락 가는 희한한 사내 징크스라도 있나 보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를 들으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난 복장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해서 참 다행이야.
실제로 방송국은 풍경은 아주 자유롭다. 넥타이까지 갖춘 수트의 정석, 블레이저만 걸친 비즈니스 캐주얼, 편안한 후디에 청바지, 촬영 혹은 답사를 가는 듯한 트레이닝 셋업, 며칠 밤을 샌 게 분명한 수면 바지까지. 휘황찬란한 룩북이 한 데 모이는 엘리베이터는 그야말로 패션의 용광로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방송쟁이들도 복장에 날을 세울 때가 있다. 촬영 날이다. 촬영 날의 복장 수칙은 간단하다. 활동하기 편할 것. 노출이 없을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색깔이다. ‘촬영용으로 합격’ 목걸이를 받는 복장은 바로 올블랙이다.
촬영 현장에서 올블랙은 단순한 취향이 아닌 생존이자 매너다. 사방에 조명과 모니터가 깔린 곳에서 스태프가 원색 옷을 입고 다니면 화면에 그대로 반사되거나 시선을 빼앗는다. 의도치 않게 프레임에 걸리더라도 검정 옷을 입고 있으면 감쪽같이 지워내기가 훨씬 쉽다. 게다가 대기 공간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은데 실내외 가리지 않고 먼지투성이인 바닥에 거리낌없이 털퍼덕 앉으려면 검정 옷만 한 게 없다. 올블랙 국룰은 옷뿐만 아니라 가방이나 제작진이 들고 다니는 대본 받침용 클립보드처럼 자잘한 소품에도 적용된다. 흰 종이만 화면에 둥둥 떠다닐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 친절히 가르쳐 줬다면 참 좋았을 것을 명시된 규정도 아닌 암묵적 관행인지라 처음에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거의 한 마리 공작새처럼 등장한 거다. 첫 팀이 지역 방송국의 스튜디오 진행 뉴스 프로그램이었던지라 카메라에 걸릴 일이 전무하여 복장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탓이다. “다들 주목! 저 좀 봐 주세요!” 꽹과리 치는 듯한 빨간색 맨투맨에 긴 청치마를 입고 초록색 컨버스를 신고 갔는데 다행히 본 촬영이 아니라 리허설이라서 그랬는지 한 소리 듣는 일은 없었지만 어찌나 민망했든지. 퇴근하자마자 급하게 검정색 슬랙스와 티셔츠를 주문한 게 내 첫 촬영용 복장이다.
하루는 쉬는 시간에 친한 피디님과 수다를 떨었다. 자연스레 피디님의 차림으로 시선이 갔는데 내가 봤던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의 올블랙을 자랑하고 있었다. 피디님 벽에 서 있으면 아무도 모르겠네. 숨바꼭질하면 기네스북 오르는 거 아니야? 역시나 한없이 길어지던 촬영에 정신줄을 놓은 내 농담을 듣고 피디님은 눈알을 요리조리 굴려 눈치를 보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작가님, 우린 신발도 검은색 아니면 혼 나.” 와중에 무채색 코디에 나름 포인트를 준다고 빨간색 컨버스를 신고 있던지라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날 메인 피디님이 공개 저격을 때린 참이었거든.
“누구누구 감독님이 오늘 버.건.디─내가 들었어! 분명히 스타카토로 말했어!─ 맨투맨을 입고 오셔서 풀샷 잡을 때마다 계속 튀거든요. 우리 제작진들, 다시 한번 당부드리지만 촬영 날에는 복장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피디와 작가는 정말 큰일이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서로를 터치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덕분에 내가 신발로 지적받는 일은 없었지만(무엇보다 작가 선배들의 신발을 재빨리 스캔했더니 무지개가 따로 없어서 안심했다) 그만큼 피디님을 향한 동정이 마구 피어올랐다. 신발까지 언프리한 삶을 살고 계시는군요.
사실 올블랙 착장에 대한 큰 불만은 없다. 그렇다고 마냥 유쾌하지도 않다. 방송업계를 두고 흔히 빛과 그림자라고 비유하지만 온통 블랙으로 도배한 채 현장을 누비다 보면 정말 내 존재감 자체가 지워지는 듯해서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든다. 피해의식까지는 아니어도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로 나를 지워야 할 때 몰려오는 헛헛함이란. 간혹 연출 팀과 카메라 팀 혹은 오디오 팀처럼 소속이 있는 분들은 단체복을 맞춰 입기도 하는데 작가는 또 해당 사항이 없어서 괜히 더 붕 뜨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고심 끝에 나만의 작은 원칙을 하나 더 만들었다. 절대 후줄근하게 입지 말 것.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만큼 활동성을 최우선으로 하자면 당연히 낙낙한 상의에 통 넓은 트레이닝 팬츠가 베스트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무시하는 부류가 있다. 그것도 꽤 많이. 헐렁하게 입었다고 작가라는 직업이나 사람 자체를 헐렁하게 대하는 시선들. 백화점 명품관에서 행색으로 사람 차별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나 고리타분해서 자작글 소재로도 탈락인데 여전히 이 바닥에는 존재하더라.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스튜디오가 되든 야외가 되든 당장 거래처 미팅에 들어가도 면은 세울 정도의 모양새는 갖추려고 한다. 혼자 너무 거룩한 척하나 싶기는 한데 할리우드 감독이자 배우인 타이카 와이티티가 “영화 세트장은 내 온라인 게임이므로 무조건 슈트를 입는다.”는 철학을 고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이야, 역시 거장은 달라. 그래. 촬영장은 내가 피땀 눈물 흘려 일하는 성스러운 노동의 현장.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 내 옷차림과 태도가 내 격을 대변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챙기기로 한 거다.
그러고 나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올블랙에 가려진 뜻밖의 장점도 꽤 쏠쏠하게 발견했다. 우선 현실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출근 치트키가 없다. 오늘 뭐 입지? 고민할 시간 대신 보너스 꿀잠 10분 확보. 얼룩과 오염에 관대한 덕분에 심리적 편안함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은근히 시크한 무드란 말이지.
무엇보다 올블랙은 사적인 자아에서 프로의 자아로 전환하는 스위치가 된다. 슈퍼 히어로들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사건이 터지면 쫄쫄이 슈트로 갈아입고 날아가듯, 일상의 나를 잠시 내려놓고 검정 전투복으로 무장하는 순간 ‘작가인 나’라는 정체성이 확고해진달까. 그렇게 도착한 현장에는 나처럼 올블랙 전투복을 갖춰 입은 제작진이 한가득이다. 검정으로 무장한 채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마치 팀업 무비의 클라이맥스를 연상케 한다.
화면 뒤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부지런히 손발을 굴려야 현장이 막힘없이 돌아가고 우리가 준비한 무대 위에서 출연자들은 마음껏 제 색깔을 발산한다. 화면 밖이 무채색일수록 화면 안은 더욱 생생한 원색으로 채워지고 그 싱그러운 에너지가 전파를 타고 나가 대중에게 전달되리라…는 거창한 마무리는 내가 봐도 희망 회로를 심하게 돌린 결말이라 민망합니다, 하하.
아무튼 이 모든 번지르르한 포장도 어디까지나 일을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중요한 건 겉모습이 아니라 알맹이. 올블랙을 입든 총천연색을 입든, 슈트를 입든 수면 바지를 입든 뒷말 안 나오게 일만 깔끔하게 해낸다면? “오케이, 복장 합격.”이라는 말씀.
◉ Off the Record
나 혼자만 뻘쭘했던 공작새 사건 이후 늘 올블랙을 고수했지만 팀을 옮겼더니 이번에는 다들 알록달록 입고 와 또다시 뻘쭘했던 적도 있다. 한편 전원 올블랙을 당부했던 제작사의 또 다른 메인 피디님은 당당하게 올화이트로 나타나기도 했다. 역시 이 바닥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야.
본문에서 언급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촬영 현장 모습입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토르⟫ 시리즈와 여러 영화제를 휩쓴 ⟪조조 래빗⟫의 감독으로 유명하죠.
물론 이렇게 캐주얼하게 입을 때도 있지만요. 언제나 스타일을 고수하는 애티튜드가 참 멋지더라고요. "일을 하러 갈 때"는 그에 맞게 옷을 잘 입어주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