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무제는 남 일입니다
※ 전 편에서 이어집니다.
작가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다. 관계자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극기 훈련을 방불케 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나마 출연자들에게는 틈틈이 휴식이 주어졌고 예정된 일정을 마치면 숙소로 돌아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제작진에게는 언감생심. 슬레이트를 치자마자 곧바로 다음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흥행을 좌우하는 프로그램 극초반부에 해당하는 촬영분이라 힘을 줘야 했고, 그만큼 신경 쓸 부분이 많아 온 스태프가 나서도 일손이 모자랐던 탓에 교대 근무조차 사치였다.
와중에 나는 촬영 전부터 이미 헤롱헤롱 댔다. 바로 전날까지 중요한 구성 하나를 부러뜨리지 못해 회의가 예상보다 늦게 끝났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최종 대본은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완성됐다. 촬영 준비가 줄줄이 미뤄진 건 당연한 수순. 대개 촬영장에는 제작진 본부라고 불리는 간이 사무실이 차려지지만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간이일 뿐이라 현장에서 세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말인즉슨 모든 준비를 회사에서 끝내야 한다는 건데 야속하게도 이런 잡무는 온전히 막내(댓츠 미)의 몫인 데다가 주어진 시간마저 턱없이 부족한 상황.
선배들이 퇴근한 후 후배 막내 작가와 단둘이 눈물겨운 고군분투를 했다.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조연출들도 함께였다. 잡담하는 시간도 아까워 ‘피디님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어.’ 동병상련의 시선만 교환하는데 잠시 사무실에 들른 어느 피디님이 조연출 후배들에게 날린 무시무시한 경고가 내 귀에도 꽂혔다.
“너희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 농담 아니라 일주일 동안 못 자. 지금부터라도 돌아가면서 자 둬.”
피디님도 참 과장이 심하시네, 하하. 한 치 앞도 모르고 속으로 웃어넘겼거늘 정말 일주일 내내 뜬눈 신세일 줄이야. 타임테이블에… 잠깐만, 27시? 이거 뭐야? 나 이거 봤어. CGV 용산 아이맥스관 오디세이 시간표잖아. 우리는 이걸 새벽 세 시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00시로 리셋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에 해당하는 거 아닙니다. 누굴 속이려고.
그런데 사람이 참 신기한 게 일이 몰릴 대로 몰리면 잠을 아무리 못 자도 잠이 안 온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과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긴장감에 원치 않아도 24시간 각성 상태가 유지된달까. 동틀 즈음 가까스로 준비를 마쳤고 숙직실에서 대충 샤워만 한 후 도착한 스튜디오에서 첫 촬영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 장소를 옮겨 다음 촬영이 이어졌다. 하루의 경계가 모호한 마라톤 촬영이 계속됐다. 내 몸은 이미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관성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사흘쯤 되던 날. 제작진은 물론이거니와 출연자들도 순전히 정신력 하나로 견디던 살벌한 스케줄 속에서 우리의 몰골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도 입고(난 그래도 갈아입었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24시간 내내 출몰하며 촬영장의 유령처럼 현장 곳곳을 맴도는 우리가 말이다. 잠시 제작진 숙소에 들러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함께 이동하던 길이었다. 외국인 출연자가 참다못해 질문을 던졌을 때가.
“한국에는 노동법이 없나요?”
아련한 표정을 곁들인 짧은 한마디에 수많은 함의가 읽혀 순간 웃음이 터졌다. ‘할많하않’의 정의를 묻는다면 바로 이 순간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뭐라고 답했더라. 멋쩍은 미소로 무마한 후 출연자를 인터뷰실에 데려다주고 선배들에게 이 이야기를 공유했던 듯하다.
─ ○○가 한국에는 노동법 없냐는데요?
─ 뭔 나라 망신임. 진짜 웃기다. 아니, 사실 안 웃겨.
─ 내가 말했지. 노동청 홈페이지 스플릿뷰로 켜놓고 일해야 한다니까? 죄바카라감 기법으로 가.
해외 촬영을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비용 문제 때문에 현지 스태프를 고용할지 한국 스태프가 장비를 이고 지고 가져올지 논의하는데 하루치 페이를 따져 보니 현지 스태프 쪽이 나아 보여 계약을 진행하려던 차에 협업사 쪽이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가 말하는 ‘하루’가 설마 24시간은 아니지?”
당연한 소리를 하네. 1일=24시간인 거 모르세요? 하지만 그들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루란 일반적인 법정 노동 시간, 그러니까 나인 투 식스였다. 협업사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러면 안 되지, 우리는 그렇게 안 돼. 한국 무섭다, 무서워.
올 초에는 셋로그(setlog)라는 앱이 화제였다. 유행에 편승해 Y 선배의 주도로 방송작가의 지난한 하루하루를 찍어 보기로 했다. 야심 차게 개설된 방에서 Y 선배는 새벽 네 시에 촬영 배차를 타고 있는 첫 로그를 마지막으로 24시간 동안 모습을 감췄다. 등장 이후 만 하루, 그녀는 왜 우리를 남겨 두고 떠났나? 궁금한 이야기 Y. 셋로그는 한 시간마다 딱 2초만 촬영하면 되는 시스템인데 그 짧은 순간조차 휴대폰을 꺼낼 여유가 없었던 거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안다. 시간의 여유는커녕 마음의 여유조차 싹 달아나 버리는 그 치열함을.
주 52시간 근무제가 제정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의 울타리 안에 있는 근로자들을 위한 이야기다. 그들과 함께 출퇴근하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목표를 위해 같은 업무를 해도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프리랜서에게 노동법은 별세계 이야기라 생각하는 편이 낫다. 실제로 법의 보호를 받으리라는 기대를 품어본 적도 없고.
그래도 똑같이 주 7일 출근 도장을 찍고 밤을 새우는데 누구는 주휴수당에 야근수당도 모자라 심지어 주유비까지 꼬박꼬박 받아 가는 반면, 누구는 막차가 끊겨도 사비로 택시를 타고 쥐꼬리만 한 페이가 통장에 찍히는 걸 볼 때마다 울컥하는 건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꼬우면 너도 언론고시 통과해서 본사 PD 하라고요? 잠시만 이리 와 봐요, 아니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잠깐 와 보셔.
물론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진리는 이 바닥에도 적용되어 방송사(제작사)나 프로그램, 혹은 메인 작가의 성향에 따라 꼭 자리를 지켜야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재택근무를 권장하며 효율적으로 일하는 팀도 많다. 연차에 따른 업무 분담과 숙련도 역시 무시하지 못한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몇 번의 자막 작업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경험치가 쌓여 자막을 쓰는 시간은 현저하게 단축됐다. 이번에는 회의 날짜가 바뀌어 급하게 넘겨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밤을 새웠지만 말이다.
주말 아침, 완본 파일을 넘긴 후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웠다. 가족들이 느지막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예민한데 잠귀까지 밝아 아주 작은 생활 소음에도 잘 깨는 탓에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이제 자니까 쉿, 떠드는 소리 조금만 작게. 막 곯아떨어지려고 하는데 억울해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우씨, 이렇게 살아야 해?! 집에서 맘대로 얘기도 못 하고! 거, 미안하게 됐소. 그래도 난 아직 방송작가를 그만둘 생각은 없고 독립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서너 시간쯤 눈을 붙인 뒤 정신도 차릴 겸 카페인을 수혈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후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언니, 이번 자막 너무 재밌어요! 역시 저만의 코미디언.
그래, 이거지. 뺑이친 보람이 있구나. 이 맛에 노동법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도 일한다니까.
치열하게 만든 결과물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붐업되는 걸 보면 잠은 죽어서 자면 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대다수가 주목하지 않더라도 크레딧 끝자락에 영원히 박제되는 이름 석 자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고스러움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그렇게 지독하게 일한 덕분에 삶을 마주하는 에너지의 기준이 높아졌고, 남들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내는 법과 그 가치를 배우기도 했으니까.
우는소리를 달고 살고,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툴툴대고, 가족들에게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할 때 가장 뿌듯하다. 한 번 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흡입하며 피로를 달래 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조만간 또 찾아올 그 치열하고 뜨거운 날들을 기꺼이 맞이하겠노라고.
⦿ Off the Record
자막 작업의 주체는 방송국마다 또 프로그램(팀)마다 천차만별이다. PD의 영역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고 작가의 일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다. 내가 거쳐온 팀들은 대부분 작가의 업무로 분류했는데 머리를 쥐어짤 때마다 PD가 자막을 담당하는 팀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반면 내 동기 중에는 단 한 번도 자막을 써 본 적이 없다며 되려 “작가가 자막을 왜 써?”라고 묻는 이도 있다. 구인 공고에 심심치 않게 명시된 ‘자막 경험이 있는 작가님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작가와 PD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업무라는 걸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