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남편은 이상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찾더니, 급기야 배편 시간표까지 출력해 들고 다녔다. 제주도 바카라방 투어를 가자고 했다. 평소라면 "이 근처나 돌아보자" 하던 사람이 바다 건너 제주라니. 그것도 비행기도 아닌 배편이었다. 가볼 바카라방 몇 군데의 동선까지 이미 짜놓고 있었다.
"왜 갑자기? 무슨 일 있어?" 하고 묻는 내게, 그는 "가기 싫어?" 하고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아니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말은 전에도 했지만. 근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또 왜 저렇게 치밀한 거지.
의아하긴 해도 "난 좋아요"라는 말이 곧바로 나갔다. 그 제안이 미심쩍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웠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마음이 심란하던 참이었다. 방학이 되니 거짓말처럼 입맛이 돌아오고 밤마다 눈이 감기고 잠이 왔다. 그동안 아침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아,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하나’ 싶었다. 솔직히 말해 출근이 하기 싫었고, 마음 가는 대로 지내는 나를 자꾸 상상했다.
내 몸이 참 많이도 참고 버텨왔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더 미루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걸 알고 나니 퇴직을 하루라도 빨리 결정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남편은 입만 열면 "나는 아직 멀쩡해"하며 정년까지 버틸 기세였다. 정 힘들면 나더러 먼저 그만두라며 내 앞에서 괜찮은 척을 했다. 그러나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드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역시 나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런 사람이 겨울이 되자 프린터로 뽑아낸 지도 위에 촘촘히 바카라방들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 작아진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카라방투어는 그냥 핑계 같았다.
그러니 나는 혼자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내가 쉬고 싶은 만큼 그 사람도 함께 쉬었으면 했다. 다만 그 말을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찾지 못했을 뿐.
며칠 동안 기와집으로 된 바카라방부터 넓은 카페로 꾸민 곳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우리는 마치 숨은 맛집을 발견해 별미를 맛보듯, 제주 곳곳의 바카라방 구경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다. 며칠은 그렇게 바카라방을 돌았으니, 다음 날 하루는 오름이나 성산일출봉 같은 풍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부터 제주에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어디를 가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비자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령 깊은 비자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라면, 거센 겨울바람과 추위를 조금이나마 막아줄 것 같았다.
그날의 비자림은 사람보다 비자나무가 더 많았다. 겨울바람이 비자나무 가지 사이를 쉼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제법 보였지만, 숲 안으로 들어갈수록 발걸음은 뜸해졌고 사람들의 말소리마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낸 비자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웅장하게 가지를 펼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한 좁은 오솔길이 이어졌다. 숲이 깊어질수록 공기는 서늘하고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고요해졌다.
남편과 나는 좁아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하는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걷는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결심은 늘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찾아왔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오래 붙잡고 있던 말 하나가 떠올랐고, 지금 말하지 않으면 또 언제 말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남편이 돌아봤다.
"우리 같이 퇴직할까요."
말을 꺼내놓고도 속으로 좀 멋쩍었다. 퇴직이야 각자 알아서 하는 건데, 굳이 같이 하자고 조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거절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들었을 텐데도 쉽게 반응하지 않는 건 여전했다. 뭔가 말하려는 듯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생각해 볼게."
"충분히 생각해 봐요. 그런데 나는 이미 마음먹었어요."
해가 지면서 숲이 금세 더 서늘해졌다. 손끝부터 아려오더니 장갑을 껴도 시렸다. 내려오는 길은 손발이 굳어 얼른 나가려는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무덤덤하게 걷는 그에 비해, 내 발걸음은 한결 가볍기만 했다.
비자림을 다녀온 뒤로 퇴직 이야기가 조금씩 늘어났다. 대부분이 내가 먼저 꺼낸 말들이었다.
"늦잠을 자도 뭐라 할 사람 없지."
"눈치 보며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
"계절 바뀌면 여행도 가고."
"나는 글도 좀 쓰고 싶어."
말하다 보니 이미 퇴직한 사람처럼 술술 나왔다. 정작 퇴직은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남편은 옆에서 듣는 둥 마는 둥 별 표정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시골집을 고쳐볼까."
"당신 서재도 하나 만들고."
"전국의 바카라방도 다니고."
그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가 했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른 해 넘게 다닌 각자의 일터에 나란히 사표를 냈다. 결국 우리는 같은 날, 함께 일을 그만둔 부부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소확행을 그려 둔 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저 늦잠을 자고, 계절에 따라 여행을 다니고, 그림과 글을 배우고, 느긋하게 사는 것.
그때는 정말, 그럴 줄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