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돌아보면 나는 늘 다음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언제쯤 퇴직하면 좋을지, 어디에서 살고 무엇을 배우며 살아갈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려 두었다. 내 삶의 대부분을 함께했던 교직을 조금 일찍 마치기로 한 것도, 그렇게 준비해 온 계획의 일부였다. 아이들처럼 꼼꼼한 계획표를 붙여 놓지는 않았지만, 제2의 인생만큼은 마음속으로 자신 있게 그려 볼 수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여행 가방을 챙기고, 오래된 시골집을 손보고,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배우고, 마음껏 바카라을 읽는 시간들.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삶인데도 이미 내 것이 된 듯 설레었다.
내 계획표 위로, 마지막 근무일은 천천히, 그러나 어김없이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그려 온 삶을 하나씩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퇴직하면 좋은 날들만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퇴직을 하고 보니,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정해 놓은 순서는 뒤로 밀리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하나둘 끼어들었다.
여행보다 먼저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라는 풀을 만나게 했고, 여유롭게 바카라을 읽기보다 부모를 돌보는 시간이 먼저 찾아왔다. 고치고 있던 시골집은 꿈꾸던 만큼 쉽게 삶의 터전이 되어 주지 않았고, 주소를 옮긴다고 마음까지 함께 이사 오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한동안 이방인처럼 서성이며 마음 둘 곳을 찾아야 했다.
그래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늦어졌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언젠가는 다시 내가 그려 두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의사가 말했다.
"암입니다."
꿈에도 생각한 적 없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하루하루가 어디론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 무언가를 통째로 빼앗긴 기분이었다.
부모를 돌보면서도 정작 내 몸은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매일 공원을 걷고 요가를 했으니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음에 검사받지 뭐.' 그렇게 미뤄 둔 몸은 더 이상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 연재는 특별한 깨달음이나 극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툴기 짝이 없는 한 사람이 계획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기록이다.
퇴직보다 부모의 돌봄이 먼저 찾아왔고, 전원생활의 낭만보다 현실이 먼저 다가왔으며, 그 모든 돌봄의 끝에서 이번에는 내 몸을 돌보는 차례가 되었다.
그때는 서로 상관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그건 다 나를 향해 걸어오던 길이었다. 그 이야기를 천천히 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