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살았다. 퇴직이라는 선 하나를 넘으면, 불확실했던 삶에도 명쾌한 지도 한 장이 쥐어질 줄 알았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무엇을 하며 지내면 좋을지, 다 표시된 지도. 그 지도를 손에 쥐는 순간을 자주 상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살면서 그렇게 잘 짜인 지도를 믿어본 적도, 그대로 따라 걸어본 적도 없었다.
젊은 날, 우리 차 조수석 서랍에는 두꺼운 전국도로지도 한 권이 늘 들어 있었다. 스마트폰도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도로 표지판과 지도에 의지해 길을 나섰고, 막히거나 길을 놓치면 차를 세워 다시 지도를 펼쳤다.
"이 길이 맞다니까."
그러면 남편은 지도를 다시 넘겼다.
"아까 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어."
결국 좌회전이냐 우회전이냐 긴 설전이 오가고, 좁은 차 안은 길을 잃은 두 사람의 목소리만 커졌다. 문제는 길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는 지도를, 나는 감각을 믿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틀어진 길에서 답답해서 물으면 그는 한참 뒤에야 짧게 말했다.
"생각 좀 하고 있었어."
그때의 나는 그런 침묵이 못내 서운했다.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다가 라디오 볼륨만 괜히 높였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을 아끼고,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 나는 먼저 감으로 판단하고 움직였고, 그는 생각이 정리된 뒤에 움직였다. 뒤늦게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는 알게 됐다.
알고 보면 우리도 닮은 점이 많았다. 이름 없는 동네 바카라방에 들러 바카라 구경하는 걸 좋아했고, 미술관에 가서는 그림을 본 후 아트숍에서 꼭 기념 굿즈를 샀다. 또 주변 사람들이 신축 아파트로 하나둘 떠나도 우리는 거의 27년을 한집에 눌러앉아 살았다. 새것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것도 비슷했다.
그러다 번잡한 게 싫다며 조용한 산속이나 숲길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어느새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이젠 벤치부터 찾는 나이가 되었다.
"좋네."
"그러네."
나도 남편처럼 이런 짧은 한마디가 가능해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톨게이트를 잘못 빠져나오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누구 때문인지부터 따졌을 텐데, 이제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다음 길을 찾는다. 운전하는 남편은 앞을 보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달릴 때도 있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
말을 많이 해야 괜찮은 사이가 아니라, 말이 없어도 편한 사이가 되었다.
우리 부부가 남들 보기에 유난히 살가운 편은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다니는 일은 드물고, 꼭 붙어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참 보기 좋다며, 우리를 사이좋은 친구 같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티를 많이 내지 않아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산다. 꿈이 먼저냐 현실 자각이 먼저냐를 두고 서로 답답해한다. 그 차이가 때로는 서로에게 숨 쉴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퇴직이라는 큰 갈림길 앞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남편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었으면 했다.
나는 그와 계속 걷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