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여운 나의 크산티페

이상과 현실의 수레바퀴 속에서 피어난 시선

by몸글 작가 고결

3부. 바닥에서 피어난 끈끈한 가족의 초월적 연대



'소크라테스'는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수많은 젊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플라톤'은 잘생기고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당시 '엄친아'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런 그도 소크라테스가 지닌 지혜를 흠모하며 따르던 수많은 청년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추남과 미소년 엄친아의 '브로맨스'로 두 사람의 관계를 부각하며 점점 흥미를 끌던 동영상 철학 강의를 보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내내 듣고 있던 아내가 툭 하니 한마디 내던졌다.


"난 소크라테스가 싫어."


"왜?"


"그 사람은 뛰어난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아내를 고생시킨 무능한 사람이잖아. 그래서 싫어."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남긴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라는 우아한 명구는 아내의 그 서슬 퍼런 한마디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방 한구석으로 맥없이 처박히고는 방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던 철학적 낭만은, 이내 아내의 윙윙거리는 청소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손에 잡히는 현실에 살고 남자는 허망한 야망에 산다.


아내는 배부른 돼지가 될지언정 결단코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선택하지 않으리라.


여자인 아내에게 아무리 찬란한 지혜를 지녔다 한들, 소크라테스는 그저 가족의 생계를 떠넘기고 아내가 평생을 고생하게 한 무능한 남편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아내를 고생은 고생대로 시키고 '세기적인 악처'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만든 남편의 '무능함'에 대해, 아내는 분노를 넘어선 적개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 기세에 감히 뭐라 입을 떼기 힘든 살벌함이 느껴졌다.


무능한 남편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의 불똥이 수천 년의 시공을 건너 행여나 나에게 튀어 올까 봐 나는 슬그머니 영상을 꺼야만 했다.


경제력이 없는 남자는 눈치라도 빨라야 한다는, 오랜 결혼 생활로 생겨난 비굴한 생존 본능이 반사적으로 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혜란 존중받을 수 없다는 아내의 지극히 현실 중심적인 판단이 매정하고 비정하게 여겨지다가도,


문득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인 나를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데리고 사는 아내의 기준은 대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아마도, 삼십 년을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면서 자연스레 뼛속까지 우러난 짠하고 측은한 감정 때문일 것이다.


경제력 없는 남편을 만난 아내는, 가지고 싶어도 참으며 산 것이 참 많은 가여운 여자다.


1995년, 우리는 결혼을 위해 종로 귀금속방에 가서 다이아반지 대신 가짜 다이아반지를 예물로 맞췄다.


돈 많이 벌어서 큼지막한 진짜 다이아반지를 사주겠다고 철없이 약속했었다.


하지만 살면서 사줄 기회가 생겨나도 이런저런 삶의 팍팍한 우선순위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버렸다.


세월은 지나고 지나, 이젠 남편을 도와 험한 택배 일까지 하느라 아내의 손은 거칠게 망가지고 고된 노동의 흔적만 남았다.


남편 잘못 만나 예쁜 손 다 망가졌다며 곁에서 신세 한탄하는 아내를 향해 "다이아반지 대신에 다이야 같은 눈빛으로 평생을 바라보겠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가,


어디 인생을 날로 먹을 셈이냐는 아내의 강력한 응징에 멀쩡한 두 눈을 뽑힐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낯선 일, 낯선 환경에서 일하는 남편이 걱정스럽다며 한사코 까대기(분류 작업) 현장에 함께 나오는 아내의 마음을.


무겁고 험한 똥짐들이 쏟아져 나오는 날이면 나는 안절부절못한다. 연신 짐들을 쌓으면서도 내 눈길은 쉴 새 없이 레일 곁의 아내를 향한다.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선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고,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무언의 위로이자 연대를 의미했다.


놀라운 것은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던 아내가 굉음을 내는 레일 곁에서 동료들과 수다를 떨며 웃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이젠 우리 짐뿐 아니라 곁에 있는 동료의 짐들도 챙겨주고, 간식이나 음료를 부지런히 나누며 활기를 띤다.


아내가 택배 레일 주변에 나온 뒤로 삭막했던 우리 탑차 주변은 사랑방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육체적으로 힘들 텐데도 재미있다는 아내를 보며 안심이 되면서도, 지친 기색이 보일 때면 금세 가슴이 아려온다.


아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늘 그렇게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어쩌다가 서로의 눈길이 마주칠 때면 말없는 미소가 오가고, 그렇게 우리는 갈등하고 원망하며 함께 슬퍼했던 숱한 유랑의 시간을 거치고 거쳐 늘 그랬듯 여기서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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