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삼십 년의 눈 맞춤이 빚어낸 초능력

남편이라는 다이아몬드를 세공해 가는 여정

by몸글 작가 고결

3부 바닥에서 피어난 끈끈한 가족의 초월적 연대



아내와 삼십 년 가까이 살면서 나에게도 묘한 초능력이 생기긴 했다. 서로 말없이도 속감정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절로 느낌이 왔다.


어느 날, 배우 고두심 씨가 나오는 초능력 가족 드라마에 푹 빠졌던 아내가 글을 쓰던 내 눈앞으로 갑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말없이 동그랗게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엉뚱한 행동에 난 웃음이 났다가 이내 긴장했다.


"모르겠냐고. 내가 말하는 걸 느껴, 못 느껴? 텔레파시가 안 느껴지냐고."


고두심 뺨치는 아내의 '눈 맞춤 초능력' 시도였다. 희한하게도 부릅뜬 아내의 까만 두 눈동자를 투과해, 개수대의 반쪽을 차지한 채 까맣게 잊고 방치해 두었던 설거지거리가 번쩍 생각났다.


"아, 이제 설거지를 해야겠네."


"그렇지! 느껴지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확 느껴지지? 빨리 가서 해."


자신의 초능력에 대단히 흡족해진 아내는 한마디 던지고 쿨하게 뒤돌아 나갔다.


아내 덕분에 나 역시 나이 들수록 말없는 사물들과 소통하는 신통한 능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설거지 개수대 속 소형 초음파 식기세척기 안에 그릇을 넣으며 "너 없으면 나 어쩔 뻔했냐" 하고 진심 어린 고마움에 너스레를 떨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한창 바쁘게 택배 상자를 나르는 숨 가쁜 상황인데도, 아파트 정원에 난 파릇한 녹색 잎새들과 키 작은 단아한 꽃들이 어찌나 정겹고 예쁜지 저절로 눈길이 가고 혼잣말로 인사를 건네게 된다.


구르는 낙엽에도 까르르 웃고 운다던 사춘기를 지나, 사물과도 감정을 나누는 '오춘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들이다.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가만히 입속으로 삼켜진 말들과 여운이 왜 그리 크게 들리고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가만히 혼자 아파하고 힘겨워했을 아내의 지난 시간들이 눈앞에 선연히 펼쳐지는 것도 바로 이 사물과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 탓일 게다.


커피에는 시럽 두 번, 곁들이는 빵은 커피번. 콩국수와 팥죽을 좋아하고, 화려한 스타일보다는 수수한 옷차림, 굽 높은 구두보다는 편안한 단화를 즐겨 신는 사람.


엄격하게 질바카라하는 아버지보다는 다정한 남편이기를 원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곁에서 들어주며 맞장구쳐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아내.


그러나 남자의 보편적 상식을 수시로 벗어나는 변화무쌍한 여자의 감성은 제아무리 초능력자라 해도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유 불문하고 여자인 아내가 느끼는 현재의 감정과 지금의 생각이 언제나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아내의 정답에 나를 맞추려 낑낑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내가 저렇게 사람 만들려고 이 고생을 하며 살았네."


나이 들면 눈은 자꾸 나빠지는데 귀는 왜 이리 밝아지는지 모르겠다.


큼지막하게 들려오는 아내의 자그마한 혼잣말에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한데, 오히려 가슴은 왜 이리도 먹먹해지고 시려오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서 혼자 아파하고 힘겨웠을 아내의 마음과 모습이 그대로 읽혀 자꾸만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기만 하다.


철학자 마틴 부버는 세상이 두 겹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나와 그것>이라는 모진 물질적 세계를 뚫고 <나와 너>라는 진정한 인연의 세계로 힘겹게 서서히 나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허전하고 막막해질 때면 가만히 곁에서 잠자는 아내의 숨소리를 통해 평온함이 되살아나고,


삶이 힘겹고 고단할 때면 바쁘게 택배를 하며 건물 속으로 사라지는 아내의 뒷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며 나약한 나 자신을 질바카라하게 된다.


남편은 허황된 꿈에 살고 여자인 아내는 그런 남편의 사랑에 산다.


그렇게 화성과 금성만큼 동떨어진 부부가 삼십 년의 세월 동안 간격을 좁혀가며 가녀린 서로를 단단하게 엮어냈다.


어찌 보면 가난이란 녀석이 나에게 바보같이 순수한 여자를 인생의 가장 큰 선물로 안겨줬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아내를 통해 나만의 몹쓸 자부심도 생겨난다. 소크라테스 조차 가지지 못한, 돈이 없어도 아내를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를 하나씩 체득하며 산다는 허세 섞인 몹쓸 자부심 말이다.


여자인 아내에게 진정한 다이아반지는 어쩌면 남편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다정하게 자신만을 위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그런 남편이 아내에게는 진정한 다이아반지다.


그 잘난 '다이아몬드' 결정체를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는 삼십 년 넘게 서로를 깎고 다듬어 온 것이다.


가여운 나의 크산티페. 과연 우리 아내는 죽기 전에 제대로 된 다이아반지를 한 번 껴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눈빛으로 다이아몬드를 대신하겠다는 투명한 초능력 타령보다는, 그냥 실물 '다이아' 반지를 사서 선물하는 게 내 생존을 위해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염력으로 숟가락을 엿가락처럼 구부리며 능력을 과시하는 초능력자가 되기보다는, 고달프지만 기꺼이 선물처럼 다가와 준 아내를 위해 나 자신의 뻣뻣하고 모난 자아를 굽힐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삼십 년 세월이 내게 가르쳐 준 진짜 초능력은 아닐까.


옆에서 잠자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스물네 살 아들이 한마디 거든다.


"참, 가장이란 힘드네. 쉽지 않은 삶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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