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택배 하며 불편함을 배우다

살아있음을 향한 강렬한 아우성

by몸글 작가 고결

2부 땀방울이 오만한 자아를 깎아낼 때면



폭염 경보가 내린 8월의 한낮.


배송을 위해 택배 상자들을 대차에 싣고 아파트 로비에 들어서자, 천장의 시스템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인공 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단숨에 휘감는다.


완벽하게 통제된 쾌적함.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대리석 바닥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바깥세상의 덥고 습한 계절과는 완전히 단절된 편안한 안쪽 세상이다.


하지만 고객의 문 앞에 물건을 내려놓고 1층 공동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바깥세상은 이내 사나운 본색을 드러낸다.


굳게 닫혔던 유리문이 열림과 동시에 숨이 턱 막히는 거대한 열풍이 전신을 때리고, 고막을 찢는 듯한 매미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편안한 세상의 안과 밖, 안락함과 불편함이 교차하는 그 극명한 경계선에서, 나는 다시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대차를 끌고 발걸음을 옮긴다.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단지 내 도로 위를 걸으며 배송을 하다 보면, 사방에서 진동하는 매미 소리가 날카로운 소음처럼 들린다.


"드르륵, 드르륵."

요철을 넘는 대차의 둔탁한 마찰음과 "맴맴" 악을 쓰는 매미 소리, 그리고 열대야로 새벽잠을 설친 탓에 힘겹게 터져 나오는 나의 거친 숨소리가 훅훅 찌는 열기 속에서 하나로 뒤범벅된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 나는 가만히 멈춰 서서 가로수에 매달려 우는 매미들을 올려다보았다.


오 년, 길게는 십칠 년을 깊고 어두운 땅속에 갇혀 지내다가 기껏 한 달 남짓한 햇살 아래서 살다 가는 기구한 녀석들이다.


저토록 처절하게 목청을 높이는 것은 뙤약볕에 지쳐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 일분, 일초 밖에 주어지지 않아도 자신의 짧은 생을 남김없이 불사르며 “내가 여기 살아 있다.”라고 온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맹렬한 생명력이 출렁이는 아우성이었다.


땡볕 아래에서 땀에 절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배송하던 나의 거친 호흡과 녀석들의 기막힌 아우성이 겹쳐지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강렬한 동질감에 휩싸여 버렸다.


편안한 세상 밖에서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는 이 거친 노동.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힘겹고 불편한 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이 부조리한 세상 위에서 가장 정직하고 뜨겁게 살아내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 척박한 아스팔트 위에서 녀석들과 함께 부조리한 삶을 향해 맹렬히 저항하는 한 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상의 현실은 이토록 치열한 생명력의 감각보다는, 당장의 편리함을 요구하는 차가운 목소리들로 채워질 때가 더 많다.


명절 특수기 때 물량이 산더미처럼 쏟아지던 어느 날. 배송할 상품을 빨리 받아야 한다며 당장 퀵서비스로 보내달라며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고객의 짜증에 시달리는 동료를 보았다.


핸드폰을 들고 쩔쩔매는 그의 발아래와 옆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상품들로 이미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돈으로 산 편리함이 우선인 세상은 이제는 조그만 불편함이나 기다림조차 용납하지 못한다. 오직 짜증만을 격렬히 분출할 뿐이다.


하지만 그 짜증은, 현대인들이 '편리함'이라는 독에 얼마나 깊이 중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감정적 증거일 뿐이다.


그리고 택배기사가 흘리는 땀방울은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회피한 ‘불편함’의 결과물이었다.


진화인류학자 마이클 이스터는 저서 《불편함의 역습》에서 흥미로운 통찰을 던진다.


그는 "현대인은 육체적, 정신적 불편함을 완벽하게 제거한 '안락함' 덕분에 오히려 신체적 나약함과 우울, 무기력이라는 역습을 맞고 있다"라고 경고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을 지불해 '불편함'을 나 같은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주를 주며 편안한 안쪽의 쾌적함을 얻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슬롯적인 성공의 대가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날씨의 거친 변화, 계절의 냄새, 육체가 부딪히며 얻어지는 '살아있다는 진짜 감각'을 모두 상실해 가고 있다. 불편함이 거세된 안락한 세상은 사람들에게 대가로 새로운 병을 앓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불편함이 가득한 바깥의 야생 세계에서 ‘나르기 위해 태어난 존재(Born to carry)’였다.


사냥감을 추격하고 운반하는 행위는 숨이 차오르는 고된 과정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 불편한 행위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무거운 대차를 끄는 나의 이 고된 움직임은 억울한 형벌도, 슬롯적 실패의 상징도 아니다.


나는 타인이 회피한 ‘불편함’을 대신 짊어진 대가로 욱신거리는 통증과 땀 냄새의 불쾌함을 얻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덕분에 잃어버렸던 야생성과 펄떡이는 생명력을 세상 누구보다 가장 먼저 회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 연골이 파열된 동료 택배기사가 절뚝이는 다리를 끌며 배송할 짐을 자신의 탑차 안으로 나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적어도 삼주 이상은 입원해 쉬어야 할 상태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이 거친 생존의 현장에서는 타인에게 내 몫의 짐을 떠넘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기어이 자신의 할당량을 탑차에 밀어 넣고 있는 그의 굽은 등. 이를 악물고 고통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내는 그 처절한 몸짓을 보는 내내 나는 깊은 숙연함을 느꼈다.



언젠가 찬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면 저 가로수 위의 맹렬했던 매미 소리도 아득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삶을 향한 열망으로 편안함을 등진 채,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땀 흘리는 얼굴들을 마주 하는 순간이면, 내 귓가로 언제나 그 뜨거웠던 매미 소리가, 살아있다는 아우성들이 들려올 것만 같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택배라는 세상에 들어와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변 이웃의 모습들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6시 택배 하러 가는 길에 마주치는 거리의 환경미화원들, 불 켜진 가게 안의 김밥 집 부부, 허리가 굽은 채 운동하시는 할머니.


이른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정겹게 와닿았다.


나와 함께 택배차로 출근하던 아내는 쌍지팡이를 짚고는 열심히 새벽 운동을 하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냈고, 새벽 김밥을 마는 김밥집 부부를 보며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오래된 아파트 계단의 미끄럼 방지턱을 빛나게 닦으시는 청소 아주머니들의 거친 숨소리는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눈길이 한 번이라도 더 가게 된다.


잘못 배송된 물건을 걱정하며 건네주시는 경비 아저씨, 동선이 겹친 엘리베이터 앞 바쁜 와중에도 짐을 대신 배송해 주겠다는 우편집배원 아저씨의 미소는 메마른 현장의 오아시스 같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동안 전혀 이들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새삼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행복과 고통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전체이며, 고통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삶의 불편함을 피하지 말고 온몸으로 느끼며 받아들이듯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도 그냥 지켜보고 바라보며 받아들여야 한다.


삶 속에서 가장 빠른 지름길이란 불편함을 외면하지 말고,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향한 강렬한 아우성.


평범한 일상의 시간 위에 고귀한 생의 흔적들을 영원히 새겨 넣으려는 저 처절하고도 눈물겨운 동동거림을 향해, 나는 창밖으로 말없는 연대의 눈인사를 깊게 건넸다.


또다시 매미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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