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치유하는 바느질이 되다
마음의 결이 잔잔히 찢겨나가 듯이 아픈 그런 날이 있다.
배송 현장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시비들, 혹은 과거의 상처들이 불현듯 찾아와 갉아먹고는 수치심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사라질 때면, 비비언 고닉이 말한 ‘거리두기’가 떠오른다.
시간이 흐른 뒤에 삶의 이러저러한 기억들이 내 속에 쌓이고 쌓여 비로소 제대로 된 글이 된다는 그녀는, 그것을 '숙성된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서 글의 소재를 통제할 능력이 충분히 생겨나 바카라상 앞에 앉았을 때면 그제야 전하고 싶은 글을 쓸 준비가 된 작가처럼,
삶도 온전히 결실을 맺으려면, 나에게 벌어지는 고단한 상황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 아픈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는 '숙성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 '숙성의 시간'이란 치유를 위한 시간이고, '거리 두기'란 상처를 꿰매는 순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일배송, 새벽배송 등 택배의 속도전에 쫓기듯 배송해야 하는 현실의 길 위에서는 우아하게 마음을 치유하고 꿰매며 다닐 여유 따위는 없다.
배송지에 도착해 탑차 문을 여는 순간부터 택배기사의 발걸음은 숨이 차기 시작한다.
1톤 탑차 ‘포리’와 함께 내가 멈춰 서야 할 수백 개의 배송지점들, 그 사이를 잇는 걸음의 동선들이 실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하지만 마음이 찢기게 서글픈 오늘은, 가만히 ‘거리 두기’를 하며 바라보니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수많은 배송지들은 단순히 물건을 치워내야 할 고단한 붉은 점들이 아니라, 이리저리 뚫린 내 삶의 생채기들이었고,
그 점들을 촘촘하게 잇는 수많은 발걸음들은 찢긴 오늘 하루를 단단히 꿰매기 위해 수만 번 고뇌하던 푸른 실선 같은 ‘바느질’이었다.
소설 『와일드(Wild)』에서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는 산산조각 난 자신의 삶을 치유하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홀로 걷고 또 걸었다.
셰릴이 상실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친 광야를 걸었다면, 택배기사인 나는 생존을 위해, 그리고 찢긴 나의 하루를 다시 꿰매기 위해 이 도심의 길 위를 걷기 시작한다.
만두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도로변에 택배차 ‘포리’를 세우고 아이스박스 상자들을 들고 걷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서는 어두운 계단을 오르내리며 송장에 적힌 호실 주소를 확인하고 문 앞에 택배상자를 내려놓는다.
요즘 점집 00 암은 침체된 경기 때문에 찾는 손님이 많아진 건지 홈쇼핑상품을 자주 시키는데, 좁은 철제사다리를 간신히 헤집고 올라가 상품을 올려두느라 애를 먹는다.
거대한 물류센터의 상승하는 나선형 진입도로를 따라 커다란 화물차들과 함께 빨려가듯 들어가 흩어진 도크의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택배상자들을 숨이 차게 배송을 한다.
대형문구점 2층에 오픈한 캠핑용품점으로 대량의 큼직한 몰짐들을, 부지런히 화물전용 엘리베이터 속으로 옮겨 놓고 닫힘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 이젠 엘리베이터와의 동행이 시작된다. 오래된 구형 아파트단지라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많이 느리고 취소버튼이 작동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층수 버튼을 신중하게 눌러야 했고, 저층의 경우에는 차라리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배송하는 게 더 빨랐다.
배송을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는 이런저런 시비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려 하면 할수록 무표정해진다. 그저 속도를 올리려는 조바심만이 발걸음을 흔들며 재촉한다.
힘겨운 노동현장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속도의 환상에 빠지고, 발걸음을 가속할수록 하루는 더 짧고 허무하게 사라진다.
문득, 아주 힘들고 험한 배송지에서 오랫동안 배송하던 한 베테랑 택배기사의 사연이 생각났다.
더 좋은 구역으로 옮기게 되었지만 이곳 사람들과 그동안 든 정 때문에 울컥 눈물이 나면서 사뭇 아쉬워지더란 사연을 다시 떠올리면서
꼭 같은 배송구역을 바라보더라도 베테랑 택배기사의 시선은 초보 택배기사와는 결이 참 많이 다름이 느껴졌다.
오늘은 나도 배송지에서 발걸음 속도를 늦추면서, 가만히 와닿는 주변의 풍경들을 세심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연히 탑차 뒷문 앞에서 늙고 병든 강아지를 정성껏 보살피는 중이라는 사연과 함께 중년의 아주머니 얼굴에 깃든 따스하고 애틋한 애정 어린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남편 걱정에 따라 나오려는 아내와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는 어느 초보택배기사 부부의 애틋한 사연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방긋 웃어주는 해맑은 아기와 엄마의 미소도 가슴에 담긴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마주한 찰나의 온기들이 그동안 생겨난 내 가슴의 상처와 벌어진 틈을 다정히 어루만지듯 메워주고 있었다.
느끼며 걷는다는 것은 거기 있는 것들이 우리 몸속에서 들어와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걷는 행위와 택배 하며 걷는 것의 공통점은 내 몸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세상을 통해 내 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걸을 때마다 마주하는 것을 더 많이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면서 서서히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보행하는 인간>이 가지게 되는 힘인가 보다.
기나긴 걸음 끝에서 추락하던 셰릴은 이제는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빛나는 다리 저 수면아래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이제는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수많은 발걸음을 끝마친 나에게도 충분했다.
찢기고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할 수 만 있다면 삶 속에서 지극히 하찮고 사소한 순간은 없기에. 걷는다는 것은 상실의 아픔으로 무너진 삶의 잔인함에 대한 최선의 저항이다.
택배 노동을 하며 무수히 걸었던 길과 나는 그동안 실과 바늘처럼 엮이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이루어 왔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요즘은 멈추지 않는 택배센터의 굉음을 뚫고 레일 위로 흘러오는 수많은 택배 상자를 바라보면 힘겨움과 고역감을 느끼는 대신 오히려 한껏 평온해지곤 했다.
마치 빛나는 다리 밑 수면 아래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그저 바라보며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리베카 솔닛'은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 같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디뎌온 길은 쓰린 상처가 치유되고 아물어서 한결 더 단단해진 살결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