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란을 넘어 내면의 평정심을 되찾아 가는 법
배송하는데 덜컹거리던 대차 바퀴가 아파트 단지 내 도로의 움푹 팬 아스팔트 요철에 둔탁하게 걸렸다.
"아차" 하는 짧은 탄식도 무색하게, 층층이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렸던 택배 상자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푹푹 삶아대는 한여름의 열기 속에 박스 모서리가 찌그러지고, 아이스박스에는 금이 갔다. 숨은 턱 막힐 듯하고 땀방울이 눈을 찔러 쓰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헐떡이며 무너진 상자들을 하나씩 주워 다시 대차에 쌓던 그 찰나, 왈칵 쏟아지는 짜증이 나를 멈춰 세운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고생해야 하나.’
이런 감정의 정체는 바닥에 나뒹구는 상자들보다 내 처지를 더 초라하게 여기는 짙은 수치심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번듯한 직함을 달고 있던 나라면 결코 겪지 않았을, 그리고 길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조차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낯선 낭패감이었다.
한동안, 나는 나를 삶의 밑바닥으로 사정없이 끌어내리는 중력의 진짜 실체와 온몸으로 씨름을 해야만 했다.
항상 나를 힘겹게 하는 것은 쏟아진 택배 박스들의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무언가를 향한 끈질긴 집착이었다.
타인이 붙여준 과거의 이름표를 내려놓지 못한 채, 한껏 비대해져 있던 나의 '에고(Ego)'가 만들어낸 마음의 중력 때문이기도 했다.
내 이름은 무엇일까.
택배 현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고단한 육체노동만큼이나 나를 거북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호칭’이었다. 까마득한 아들뻘 동료들이 스스럼없이 던지는 “형”, “형님” 소리는 처음에는 몹시 어색했다.
대표님, 이사님. 세상이 덧씌워준 익숙한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니, 거울 속에 남은 나는 그저 땀 냄새 짙은 육체노동에 서툰 사내에 불과했다.
하지만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택배센터 레일 곁에서 동료들과 함께 소음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흘리다 보면, 그 생소했던 호칭은 이내 묘한 안도감으로 바뀌어 갔다.
과거에 어떤 화려한 명함을 가졌든, 얼마나 뼈아픈 실패를 겪었든 이곳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저 똑같은 택배 조끼를 입고, 모두에게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오늘 하루동안 감당해야 할 상자의 무게에만 집중할 뿐이다.
세상이 부여한 이름표가 모조리 뜯긴 이 거칠고 정직한 현장에서, 나란히 줄지어 물건을 골라내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나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깊은 연대감을 느꼈다.
나를 부풀리던 자아의 껍질이 땀방울에 한꺼플씩 벗겨질수록, 내면에는 텅 빈 공간이 가만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득 소설 《모비딕》의 한 장면이 스쳤다.
거대한 흰 고래를 향해 분노의 작살을 던지다 결국 심해로 끌려간 에이해브 선장처럼,
만약 내가 과거의 허상을 놓지 못한 채 현장의 척박함을 세상의 부당한 저주라 여기며 분노만 뿜어댔다면 나 역시 그 무거운 마음의 중력에 이끌려 파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은 이슈메일처럼, 나 역시 거대한 파도에 맞서 헛된 자아를 곧추세우는 대신 내 가슴속에 고요한 빈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거친 세상의 소란 앞에서는 맞서 싸우는 오만함보다, 스스로를 비워내는 겸손함만이 내 영혼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외부의 어떤 소음도 쉽게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한 내면의 '무풍지대(無風地帶)'로 힘겹게 들어와 자리 잡았다.
거친 폭풍우가 몰아쳐 파도가 수면을 사정없이 때려도, 깊은 심해의 고래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돌기둥처럼 꼿꼿하게 수직으로 선 채 평온하게 잠이 든다. 무게중심을 가장 낮은 곳에 둔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배송의 끝자락, 마지막 상자를 배송하고 화물칸의 양쪽 문을 가만히 닫는다. 무거운 짐들이 빠져나간 빈 공간 위로 식지 않은 무더운 저녁 바람이 스치듯 지나간다.
하루의 고단함을 뒤집어쓴 채 퇴근길 탑차 조수석에 올라탄 아내, 그리고 옆 자리에 구겨 앉은 아들과 좁은 차 안에서 피로한 어깨들이 서로 부딪친다.
오늘 저녁엔 김치찌개를 먹을지, 아들이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먹을지, 소박하고도 중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우리는 한껏 나눈다.
헛된 자아를 비워낸 내 가슴속 텅 빈자리로, 그렇게 아내의 지치고 가녀린 어깨와 아들의 해맑은 미소가 정겹게 스며들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거칠고도 눈물겨운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내 온몸과 전부를 기꺼이 내맡기려 할 뿐이다.
그리고 폭풍우를 통과해 마침내 고요한 무풍지대에 가닿아 조용히 수직으로 유영하며 깊이 잠든 고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