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요청 잘하는 법

저는 요청 끝에 "이건 그대로 두세요"를 한 줄 붙입니다

by김도경 dkkim

안녕하세요, 김도경입니다. 재작년 12월, 저는 이 온라인카지노에 "일을 잘한다는 것 : 업무 요청"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요청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와 숫자로 해야 상대가 바로 움직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글을 쓴 제가 그 원칙을 그대로 어겼습니다. 미팅에 쓸 14장짜리 발표 자료를 직접 만들었는데, 장마다 위아래 여백이 넓어 화면이 휑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AI에게 "위아래 여백 없애고, 좀 더 눈에 띄고 임팩트 있게 고쳐 줘."라고 맡겼습니다. 돌아온 자료는 여백만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치, 색, 글꼴까지 14장이 전부 새로 짜여 있었습니다. 결국 원래 자료를 다시 보내면서 여백만 지워 달라고 한 번 더 부탁해야 했습니다. 혹시 일을 맡겼는데 생각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돌아와 당황하신 분이 있을까 싶어, 그때 제가 알게 된 것과 그 뒤로 바꾼 것을 정리해 봤습니다. 물론 제가 정답은 아닙니다. 느낀 점을 공유드립니다.


1.

첫 번째로 알게 된 건 형용사는 받는 사람이 채운다는 점입니다. 임팩트 있게, 깔끔하게, 좀 더 세련되게 같은 말에는 맡기는 사람 머릿속에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날 제 기준은 여백만 없어지면 화면이 꽉 차 보이고, 그게 곧 임팩트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받는 쪽은 그 기준을 볼 수 없으니 자기 기준으로 빈칸을 채웁니다. AI에게 임팩트는 전부 바꾸라는 뜻이었고, 그래서 정말 전부 바꿔 왔습니다. AI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고, 애매하게 맡긴 건 저였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요청을 보내기 전에 한 번 다시 읽으면서 형용사에 밑줄을 긋습니다. 밑줄이 그어진 말은 무엇을 얼마나 바꿀지로 고쳐 씁니다. "임팩트 있게"는 "위아래 여백을 0으로"가 되고, "깔끔하게"는 "한 장에 글 세 줄 이하로"가 되는 식입니다. 재작년 글에 적어 둔 동사와 숫자를 이제야 제 요청에 조금씩 쓰기 시작했습니다.


2.

두 번째는 바꿀 곳과 그대로 둘 곳을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그날 요청에서 가장 크게 빠진 건 그대로 둘 것이었습니다. 맡기는 사람은 지킬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글꼴과 색, 장 순서가 자료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말하지 않았으니 받는 쪽에서는 바꿔도 되는 것 중 하나였던 것이죠.

요청에 "임팩트 있게"가 붙어 있으면, 받는 쪽은 더 많이 바꿔도 된다고 읽습니다.

그날 처음부터 "위아래 여백만 0으로 줄여 줘. 글꼴, 색, 순서는 그대로 두고."라고 보냈다면 한 번에 끝났을 겁니다. 금방 쓸 수 있는 문장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요청 끝에 그대로 둘 것을 한 줄 붙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맡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3.

세 번째는 이미 있는 결과물을 고쳐 달라고 할 때, 지금 것의 무엇이 좋은지를 먼저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료가 이미 전달력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결과물이 엉뚱하게 돌아온 다음에야 했습니다. "기존에 줬던 게 훨씬 전달력이 좋은데, 여백만 지워서 다시 줘." 처음 부탁할 때는 고쳐 달라는 말만 했던 것입니다. 고쳐 달라는 말만 들으면 받는 쪽은 지금 것이 별로라는 뜻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면 좋은 부분까지 같이 바꿔 버립니다. 지난 화에서 후배에게 피드백을 줄 때 잘된 점 하나를 먼저 말한다고 적었는데, 일을 맡길 때도 똑같았습니다. 순서와 구성은 좋으니 살리고 여백만 줄여 달라는 한 문장이면, 같은 일을 두 번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재작년에 그 글을 쓸 때 저는 요청을 받는 쪽에 서 있었습니다. 애매한 요청을 받으면 얼마나 답답한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맡기는 쪽이 되니 제 머릿속 그림이 너무 선명해서, 상대도 같은 그림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점은 요청을 받을 때 세운 원칙은 맡기는 자리에 서는 순간 가장 먼저 잊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청을 보내기 전에 1) 형용사에 밑줄 긋기 2) 무엇을 얼마나 바꿀지 숫자로 적기 3) 그대로 둘 것 한 줄 붙이기, 이 세 가지를 먼저 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맡긴 일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돌아왔던 경험이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 주세요. (정말 궁금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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