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를 열심히 할수록, 상대 말이 안 들렸습니다
"있으면 무조건 좋죠." 몇 년 전 작은 사업을 할 때, 식당 사장님들을 인터뷰하러 가기 전 제 메모장에 적어 두었던 문장입니다. 문제는 이 확신에 찬 한 줄이 제가 던지려던 질문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장님들이 가게에 브랜드 제품을 두고 싶어 하실지 확인하겠다고 질문을 써 놓고는, 정작 그분들을 만나기도 전에 제 마음대로 답부터 미리 적어 두었던 것이죠. 묻기도 전에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이미 정해 두었던 셈입니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켠 메모장이, 제 눈을 가리는 가림막이 되고 있었습니다.
1.
회사에 들어오기 전, 저는 빈 식당을 요리사에게 대여해 주는 작은 플랫폼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사업을 접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영업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나름의 열정으로 식당 사장님들과 매일 부대끼며 일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기존 사업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하나 더 얹어 보기로 했습니다. 식당 화장실이나 카운터에 핸드워시 같은 브랜드 제품을 자연스럽게 비치해 두고, 해당 브랜드사로부터 광고비를 받는 형태의 모델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사되려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사장님들이 가게에 브랜드 제품을 두고 싶어 하실까?'
하지만 그 질문을 메모장에 받아 적는 순간, 제 손은 이미 그 옆에 '무조건 좋아할 것'이라는 답을 함께 적어 내렸습니다. 그때는 이게 얼마나 이상한 행동인지 몰랐습니다. 예상은 그저 예상일 뿐이고, 나중에 현장에서 확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 사장님들을 만날 때마다 "가게에 이런 제품을 두고 싶으세요?"라고 제대로 여쭌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 메모장 어디에도 사장님들의 진짜 목소리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답이 적혀 있으니, 물어볼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따로 있었는데요. 처음 요리사 대여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철저히 이방인이었습니다. 업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모르는 요리사 100명에게 무작정 인스타그램 DM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감사하게도 72명이 답을 주었고, 그중 50명과는 직접 만나 커피를 마시며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현장에서 겪는 진짜 불편함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며 하나하나 받아 적었습니다. "가게를 통째로 빌리는 비용이 너무 부담스럽다", "신뢰할 만한 대여 정보를 어디서 얻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 맞는 파트너를 찾기가 어렵다" 같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전부 그분들이 직접 꺼내 놓은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 100명에게는 찾아가 질문을 던졌으면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장님 열여섯 분에게는 왜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을까요. 가까운 사이니까, 매일 대화를 나누니까 그분들의 속마음쯤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하니까 안 물어본 거였더라고요.
2.
당시 메모장 아래쪽에는 이 사업이 과연 누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지 정의하는 칸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칸이었는데, 제 메모에는 딱 이렇게 한 문장만 적혀 있었습니다. "해결해 주는 것 같다." 가장 분명해야 할 칸이 '~것 같다'로 끝나 있었습니다. 누구의 어떤 문제를 어떻게 푼다는 건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 사업은 몇 번의 피벗을 거치며 중심을 잡지 못하다가 접게 되었습니다. 사장님들이 정말 브랜드 제품을 원하셨는지, 그 진짜 답은 끝내 듣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3.
시간이 흘러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이 버릇이 가끔 나옵니다.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상대방이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질지, 혹은 무엇을 걱정할지 미리 시나리오를 짜 보며 준비하는 것은 분명 좋은 태도입니다. 실제로 한 달 전 제 온라인카지노 글에도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미팅 전에 철저히 설계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꼼꼼하게 짜다 보면, 상대의 대답까지 제가 미리 정해 버리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미팅 노트에 '상대방이 가격을 가장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고 지레짐작해 적어 두면, 그 뒤로는 모든 말이 그렇게 들립니다. 상대가 "조금 더 내부적으로 검토해 볼게요"라고 말해도 가격 때문인 것 같고, "팀원들과 우선 상의해 보겠다"고 해도 역시 비용이 비싸서 거절하는 것처럼 해석해 버립니다. 정작 상대방은 가격이 아니라, 우리 솔루션이 기존 시스템과 잘 연동될지를 걱정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이건 영업 미팅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기획서나 보고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객 반응: 매우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됨'이라고 먼저 한 줄을 그어 두면,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할 때 좋은 답만 눈에 들어옵니다. 나쁜 답은 '일부 의견'이라며 보고서 구석으로 밀어 넣게 됩니다. 팀원이나 후배와 면담을 하기 전에도 그렇습니다. '요즘 슬럼프인 이유: 최근 늘어난 업무 과다 때문일 듯'이라고 혼자 결론을 내려놓으면, 면담 시간 내내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지?"라며 제가 정해 둔 답으로 대화를 유도하게 됩니다. 그 후배가 정말로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업무량이 아니라, 커리어 고민이나 동료와의 갈등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답을 미리 적어 두는 순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듣고 싶은 답으로 듣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미팅 노트를 작성할 때 규칙 하나를 지키려고 합니다.
질문은 적되, 대답 칸은 비워 두는 것입니다.
그 칸은 상대를 만나 직접 들은 다음에만 채웁니다. 말은 쉽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매번 흔들립니다. 손이 자꾸 짐작부터 적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때 메모장에 적어 둔 한 줄을 떠올립니다. "있으면 무조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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