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중심의 사고를 하는 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지금은 회사에서 영업을 하고 있지만, 이건 전 온라인 게임에서 교육 과정을 기획하고 운영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1.
그 회사에 다니던 해 여름, 저는 꽤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준비한 새 교육 과정 기획안을 들고 팀장님을 찾아갔습니다. 현업에 있는 개발자들과 기획자들이 AI를 실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몇 달 동안 배우는 과정이었죠. 마침 AI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라 괜찮은 기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획안을 받아 든 팀장님은 한참 동안 서류를 넘기셨습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서 서류를 내려놓으며 먼저 한마디를 건네셨습니다. "컨셉은 잘 잡았네요. 여기저기 고민한 흔적도 많이 보이고요."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도경 씨, 이 기획안에는 이걸 '왜' 해야 하는지가 없어요. 그냥 결론만 덜렁 있네요."
팀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저는 멋진 한 줄부터 써 놓고, 나머지 내용을 거기에 끼워 맞추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기획안을 썼던 순서는 이랬습니다.
1. 문서의 맨 윗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제 마음에 쏙 들 때까지 다듬은 문장 하나를 올렸습니다.
‘같은 환경, 완전히 다른 속도와 품질.’
똑같은 인프라에서 일하더라도 AI를 영리하게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과물의 퀄리티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은, 나름대로 야심 찬 슬로건이었습니다.
2. 그 아래에는 이 교육 과정이 기존의 다른 교육기관들과 무엇이 차별화되는지 네 가지 근거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오류 하나 잡는 데 초보는 하루 종일 걸리지만 고수는 10분이면 끝낸다."
"현직 개발자의 90%는 AI를 그저 단순한 받아쓰기 수준으로만 활용하고 있다."
대략 이런 문장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문장들 속 숫자들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10분', '90%' 같은 숫자는 통계나 조사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 기사 제목에서 본 숫자를 제 기획에 맞게 가져온 것이었죠. 출처를 확인한 것도 아니고, 그냥 기획서가 그럴듯해 보이라고 넣은 숫자였죠.
그때의 저는 기획이라는 작업을 '멋진 한 줄을 찾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전 해에 온라인카지노에 <일을 잘한다는 것 : 아이디어>라는 글을 기획해 올리기도 했거든요. 좋은 영감은 늘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내용보다 단어부터 찾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 기획안이 꽤 괜찮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2.
며칠 뒤 아침, 팀장님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오더니 저를 자기 자리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본인이 직접 작성해서 통과시켰던 교육 과정 기획안을 모니터 화면에 띄웠습니다. "도경 씨, 기획안은 내 아이디어를 자랑하는 보고서가 아니에요. 이 문서를 읽는 의사결정권자가 '이게 지금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어 가게 만드는 설득 문서예요." 팀장님이 보여 주신 기획안은 네 장짜리 문서였는데, 흐름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제가 기획안을 썼던 순서와 정확히 반대였습니다.
1. 첫 장은 대기업들의 채용공고였습니다. 이 교육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들의 최종 목적은 결국 취업이나 이직일 테니, 기업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부터 보여준 것입니다. 국내 대기업 네 곳의 공고를 나란히 붙여 놓고, 그들이 공통으로 요구하는 능력 세 가지를 추려 두었더군요.
2. 둘째 장에는 수강생들의 고민이 담겨 있었습니다. 취업 커뮤니티와 개발자 블로그를 뒤져 그들이 일상에서 직접 쓴 글들을 캡처하고 링크를 달아 두었습니다. 그 목소리들 밑에 팀장님의 해석이 한 줄 붙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고 있지만, 본질은 학위가 아니라 회사가 즉시 원할 만한 실무 기술을 갖추고 싶어 하는 결핍이다.’
3. 셋째 장에 이르러서야 이미 시장에서 비슷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경쟁사들의 현황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유료로 진행되는 과정들은 수강생들이 왜 그 비싼 돈을 내고서라도 거길 찾아가는지, 그 이유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4. 그리고 제가 목숨을 걸었던(정확히 말하면 이것밖에 없었던)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차별점과 컨셉은 마지막 넷째 장에 가서야 나오더군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멋진 이름과 한 줄짜리 슬로건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있었습니다.
"컨셉이랑 이름은 집요한 조사가 다 끝나고 나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정하는 게 아니라." 제 기획안은 순서가 거꾸로였습니다. 결론을 먼저 정해 두고 그럴듯한 말만 덧붙였으니, 읽는 사람이 "왜?"라고 물을 자리마다 답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부끄러운 건 따로 있었습니다. 그 전 해에 제가 온라인카지노에 올렸던 또 다른 글의 제목이 <일을 잘한다는 것 : 납득>이었거든요. 위에서 일을 받으면 상사 탓을 하기 전에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부터 납득시켜 보라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남들에게는 왜 하는지부터 물으라고 써 놓고, 정작 제 기획안에는 그 가장 중요한 '왜'를 쏙 빼놓았던 셈입니다. 팀장님 피드백대로 같은 순서로 기획안을 다시 써 보기로 했습니다. 남겨 주신 숙제는 간결하지만 저에게는 크게 느껴졌습니다.
"시장 조사와 경쟁사 분석부터 다시 끝내 오세요. 우리가 다르게 가져갈 차별점은 네 개씩 나열하지 말고 딱 두 개만 남겨요. 대신 그 두 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네 개나 되던 장점을 두 개로 줄이는 것쯤은 금방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네 개 중에 두 개만 남기려면, 나머지 두 개를 '왜 버리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 딴에는 고심해서 내놓은 아이디어를 제 손으로 쳐내는 일은 생각보다 속상한 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빈 문서를 새로 열고 팀장님이 알려준 순서대로 칸을 채워 나갔습니다. 현시점의 채용공고들을 스크랩해 맨 위에 올렸고, 배우러 올 타깃들이 커뮤니티에 남긴 고민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시장에 존재하는 비슷한 교육 과정 세 곳의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이번에는 한 기수에 몇 명을 뽑고 수강료가 얼마인지까지 직접 알아본 숫자를 채워 넣었습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가져갈 차별점 두 가지를 붙였습니다. 앞 장의 기업 요구와 수강생 고민에서 나온 두 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누군가 "왜 하필 이 두 가지야?"라고 물어도 막힘없이 답할 수 있었습니다. 다 쓰고 나니 기획서 문장 끝마다 파란색 출처 링크가 붙어 있었습니다. 예전 기획안에서 "하루 종일", "10분" 같은 근거 없는 숫자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3.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다른 교육 과정을 개설하기 위한 회의가 잡혔습니다. 기획안을 짜기 전, 광고 문구보다 채용 사이트부터 열어 보았습니다. 확인해 보니 우리가 새로 만들려는 과정의 목표 직무는 뽑는 기업 수 자체가 눈에 띄게 적었습니다. 문득 불안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시장 수요가 적다면, 돈을 내고 배우러 올 사람들의 모수도 적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이 시장의 데이터와 의문점을 그대로 들고 회의실에 들어갔습니다. 만약 한 달 반 전의 저였다면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은 채, 어떻게 하면 이 과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할지 카피라이팅만 고민하고 있었을 겁니다. 일하는 순서가 바뀌니 보이는 게 달라지더라고요.
요즘도 제안서나 기획안을 쓸 때면 첫 페이지 제목 칸은 비워 둔 채 시작합니다.
고객이 지금 무엇을 고민하는지, 경쟁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부터 적고, 제목은 맨 마지막에 붙이려고 합니다.
ps.
그래도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전히 일하기 전 제목부터 폼나게 쓰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불쑥 찾아옵니다. 머릿속에서 번뜩인 한 줄 카피가 먼저 모니터에 찍히면, 기획이 벌써 반쯤 끝난 것 같은 착각이 들거든요.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