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 100통을 보냈고, 72명이 답했다

바카라상에서 만든 숫자와 고객에게 질문해서 얻은 숫자는 전혀 다릅니다

by김도경 dkkim

"그런 모임이 있으면 좋죠. 근데 들어갈 만한 데가 없어요." 몇 년 전, 대학생 때 하던 사업의 일입니다. 셰프들을 인터뷰하며 가장 많이 들은 답이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쉰 명 중 마흔여섯 명이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당시 저희는 팝업 레스토랑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공간을 싸게 빌려주면 셰프들이 알아서 찾아올 거라 믿었습니다.

철저히 공급자 중심의 생각이었습니다.


1.

타깃 고객도 미리 정해 두고 있었습니다.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주방에 들어간 지 1~2년 된 20대 초중반의 전공생'. 자기 메뉴를 선보이고 싶지만 기회가 없는 이들이 우리의 고객이라 확신했습니다.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셰프들에게 직접 묻기로 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셰프 100명을 찾아 무작정 DM을 보냈습니다. 단순한 설문조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연계한 공간에서 팝업을 열어 보지 않겠냐"는 날것의 제안이었습니다.


일흔두 명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피드백들은 캡처되어 그대로 사업계획서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답장을 준 이들 중 50명을 직접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조리학과 학생부터 현직 셰프, 취업 준비생까지 다양했습니다.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열에 아홉은 팝업을 열고 싶어 했고, 이미 경험해 본 이들도 열에 일곱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경험자 중에는 업계에서 실력으로 평이 자자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정했던 타깃의 한계도 단숨에 깨졌습니다. 이미 주방을 바카라임지는 메인 셰프도, 곧 내 가게를 차릴 베테랑도 모두 같은 결핍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가게를 차리기 전에 내 메뉴를 손님들에게 먼저 시험해 보고 싶어서."
"매일 반복되는 주방 일에 지쳐서, 하루쯤은 온전히 내 요리를 해 보고 싶어서."


주방의 엄격한 위계 구조상, 헤드 셰프가 아니면 자기 메뉴를 내보일 기회는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이야기를 모아 보니 이들이 마주한 장벽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1) "대관료가 너무 비싸요."

2) "팝업 정보를 어디서 얻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3) "주방에 같이 설 사람이 없어요."


2.

첫 번째 문제는 저희가 풀겠다고 나선 문제였습니다. 공간을 싸게 빌려주는 게 우리 서비스의 핵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머지 두 문제는 완전히 다른 얘기였습니다. 공간을 싸게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짜리 팝업을 열려고 해도 믿고 같이 일할 동료가 필요한데, 구할 방법이 인맥밖에 없었습니다. 정보도 아는 사람 건너 건너 주먹구구식으로 얻고 있었고요. 외식업 사장님들이 모인 큰 커뮤니티는 있었지만, 정작 현장 실무자들이 믿고 물어볼 만한 '진짜 우리 모임'은 없었습니다. 46명이 했던 말이 결국 그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저희는 방향을 조금 바꿨습니다. 동료가 필요한 셰프들을 서로 연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매칭된 팀이 여섯 번째 팝업을 성공적으로 열기도 했습니다. 한 요리 고등학교와 업무 협약을 맺어서 셰프는 믿을 만한 일손을 얻고, 학생들은 진짜 주방을 경험하는 구조도 만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사업계획서에서도 '커뮤니티'가 대관 서비스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3.

그런데 그 계획서 안에는 전혀 딴판인 숫자도 있었습니다. 바로 '시장 규모' 표였습니다. 국내 셰프 수를 대략 100만 명으로 잡고, 평균 대관료랑 수수료, 한 사람이 여는 팝업 횟수를 곱해서 무려 '조 단위'의 엄청난 숫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숫자 옆에 저희가 메모를 하나 달아 뒀습니다. "셰프 수 기준, 다시 잡아 보자." 실제로 그 숫자는 고무줄 같았습니다. 참고하는 자료마다 시장 규모가 3조 4천억 원이었다가, 다른 데서는 2조 9천억 원으로 널뛰기를 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엄청난 곱하기 공식 안에서도, 진짜 현장에서 물어보고 얻은 숫자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1년에 팝업을 몇 번 열까' 하는 데이터만 인터뷰에서 가져온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다시 잡아 보자"며 메모를 붙인 곳은 현장의 숫자가 아니라, 바카라상 위에서 대충 짐작한 '대한민국 전체 셰프 수'였습니다. 계획서 전체를 통틀어 수정 메모가 붙은 곳은 딱 그 칸 하나였습니다. 72명이 답했다는 숫자나, 46명이 모임이 없다고 한 숫자에는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았더라고요. 바카라상 위에서 머리로 만든 숫자에만 의문이 붙었던 거죠.


부끄럽지만 그 억지스러운 시장 규모 표도 제 이름이 박힌 계획서의 일부였습니다. 열심히 계산기만 두드렸을 뿐, 그 누구에게도 검증받지 않은 가짜 숫자였던 거죠. 몇 년이 지나고 저는 창업에 관한 글을 쓰면서 "무엇을 만들지보다 어떤 문제를 풀지가 먼저다" 같은 그럴듯한 문장을 적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문장을 쓴 과거의 제 계획서에도, 잘 보이고 싶어 뻥튀기한 숫자가 그대로 살아 있었던 겁니다. 72명이라는 데이터보다 제가 더 크게 배운 건, 그 답장들 속에 숨겨진 '우리가 미처 몰랐던 진짜 속사정'이었습니다.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대답은, 저희가 방구석에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절대 알아낼 수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4.

지금 회사에서 영업을 하면서도 저는 종종 무서운 매너리즘에 빠지곤 합니다. '이 고객은 분명 이게 필요할 거야.' 그렇게 혼자 답을 내리고 미팅룸에 들어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날이 허다합니다. 준비한 제 답변이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고객이 던진 '질문' 자체가 달랐던 겁니다. 물어보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과정을 건너뛸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고객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인데도 말이죠.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오래된 메모 하나가 불쑥 떠오릅니다.


'질문하고 고객의 답변을 기반으로 판단하자' 이제는 다음 단계로 가기 전에, 단 한 명한테라도 먼저 물어보려고 합니다.

100명한테 DM 보내는 건 어려워도, 눈앞의 한 명한테 질문을 던지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요. 바카라상 위에서 그럴듯하게 정의한 문제는, 대개 그냥 제가 풀고 싶었던 제 문제였더라고요.


PS. 그때 답장을 안 주셨던 28분 중에서도, 나중에 어디선가 멋지게 팝업을 여신 분이 계셨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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