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으로 여는 새벽
새벽 5시 40분, 창밖은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 시간에 굳이 집을 나서는 이유는 하나다. 오늘은 친정 식구들과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한 날, 늦어도 10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평소라면 아침 수영을 마치고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겠지만, 오늘은 수영장 오픈런이다.
6시 정각. 주말 새벽잠을 줄여가며 탈의실 1번 주자로 들어선다. 이 작은 승부욕이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텅 빈 탈의실에 첫 발을 딛는 순간만큼은 늘 짜릿하다.
수영장에 가장 먼저 들어선다는 것은 잠잠한 물 위에 내 몸을 던져 첫 물결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과학 시간에 배웠다. 연못에 돌 하나를 던지면 그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고. 오늘 아침, 내가 그 돌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물 위에 첫 파장을 내며, 뒤이어 올 사람들의 물살까지 조용히 예고한다.
머리를 물속에 넣고 몸을 수평으로 눕힌다. 물과 몸이 하나의 선이 되어 미끄러진다. 첫 번째 바퀴는 물 위의 감각에만 집중한다. 스르르르르. 물살을 가르는 소리.
두 번째 바퀴는 오로지 숨쉬기만 생각한다. 속도에 욕심내다 숨을 참으면, 리듬이 끊기고 오히려 더 느려진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음ㅡ 파ㅡ. 음ㅡ 파ㅡ. 자유형 호흡을 위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릴 때마다 물 밖 풍경이 스친다. 물속과 물 밖, 두 세계를 한 호흡에 오가는 순간. 이 찰나가 참 좋다.
가수이자 탤런트 김창완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에서 일요일 아침이면 씻기도 전에 기타부터 잡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는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걸 수십 년은 지켜봐야 비로소 그 맛을 알게되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p.95)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기타의 참맛은 모른다. 하지만 수영의 참맛이라면 조금은 알 것 같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함꼐 하고 싶은 이 반려 취미가, 김창완에게는 기타였고 나에게는 수영이다. 돌아보면 젊은 날의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살았다.
어릴 땐 비 오는 날이 오히려 신났다. 장화를 신고 일부러 물웅덩이만 골라 밟으며 첨벙거렸다. 우산은 그저 장난감과 같은 존재였다. 대학생 때는 폭우가 내려도 뾰족 구두를 포기하지 못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 다녔다. 덕분에 전철역 계단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 비가 많이 오니깐 수영장 조심히 다녀와." 남편이 현관에서 던진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예전엔 비가 온다고 하면 감수성이 폭발했는데, 이제는 걱정부터 앞선다니.
그 시절엔 정말 그랬다. 지금은 돈을 준다 해도 못 할 일들을 젊었기에 했다. 형광색처럼 선명하고 발랄한 나날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그런 생기와 발랄함은 없지만, 늙어가는 데도 나름의 맛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파스텔톤처럼 잔잔하고 여유로운 하루랄까.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미끄러질까봐 발바닥에 힘을 꽉 주고 슬금슬금 걸으면서도 수영장으로 향하는 열정은 나날이 더해졌다. 계획이 틀어져도 수정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길 여유가 생겼다. 세상의 중심은 못 되어도, 내 기분만큼은 내가 주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삶의 경험치로 얻어지는 것들은 별것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젊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나이 들어야만 비로소 맛보는 인생의 풍미가 분명히 있다.
수영. 오십 즈음에 인생 취미를 찾아 참 다행이다.
탈의실을 나서며 거울을 본다. 수경 자국이 팬더처럼 선명하다. 현실은 하루 종일 이 팬더 자국을 달고 다녀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처음 물에 몸을 던졌을 때 일으킨 그 작은 파장이 지금 이 눈가로 번져 하루를 열고 있다고 믿으며, 수모로 흰머리를 가린 물속 인어가 된 듯 오늘을 살아보련다.
당신의 오늘 아침에도, 이런 작은 파장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웃게 할 무언가를 하나쯤 찾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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