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퍼는 파도를 기다린다

통증도 결국 올라타면 그만이다

by맛있는 하루

팔을 쭉ㅡ 뻗고, 물 위에 몸을 스르르ㅡ 맡긴다. 소금쟁이처럼 수면을 가르며 슈우욱ㅡ 나아가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인다. 구름 위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유선형으로 몸을 길게 늘이고 물의 매끄러운 결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심장이 두근두근, 설렘을 내비친다.


쭉ㅡ 스르르ㅡ 슈욱ㅡ


오늘따라 자유형 글라이딩이 유난히 좋다. 물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다.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몸도 사뿐사뿐 흔들린다.


ChatGPT Image 2026년 5월 30일 오후 05_38_10.pngAI 생성 이미지 활용


수영을 마치고 개운한 얼굴로 현관문을 연다. 또 한 명의 수친자, 남편이 웃으며 묻는다.


"오늘 수영 잘했나 보네? 개운해 보인다. 그때 아프긴 했지만, 덕분에 수영 제대로 배웠잖아. 그때 수영 배우길 잘했지?"


그때란 큰아이를 낳은 후, 허리디스크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시절을 말한다. 각종 신경주사를 맞으며 재활치료로 수영을 권유받았다. 운동이라면 질색하던 내게 통증까지 겹치니, 발차기 하나 배우는 것도 극기훈련처럼 느껴졌다. 허리 상태 탓에 의사 선생님과 강사님에게 평영과 접영은 허락받지 못했다. 자유형과 배영 초급반을 겨우 마치고, 이사를 이유로 수영을 그만두었다.


3년 전, 수세권(수영장 도보권)으로 이사하며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매일 다니다 보니 점점 재밌어졌고, 즐거우니 실력도 저절로 늘었다. 지금은 자유형과 배영 모두 상급반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실력이 늘자 혼자서도 이것저것 시도하게 됐고, 그 즐거움과 실력은 서로를 밀어 올리며 점점 커졌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어, 그때 수영 배우길 참 잘했어. 허리디스크가 아니었다면 수영이란 걸 시작도 못 했을 거야."

"이 재미도 몰랐겠지."




우지현의 그림에세이 <풍덩!>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파도가 몰려오면 사람들은 파도를 피한다. 반면 이때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있다. 바로 서퍼들이다. 이들은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한 뒤 적기에 중심을 잡고 일어선다. 그리고 거침없이 파도 위를 달린다. 물론 모든 파도를 향해 돌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파도는 흘려보내고, 어떤 파도는 올라탄다. 떄로는 파도타기에 실패할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다. 다음 파도가 또 밀려올 테니. 결국 서핑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어떤 마음을 갖느냐, 어떤 것을 택하느냐,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달렸다. 언제나 서퍼는 파도를 기다린다." _p.168, 우지현, <풍덩!>


문장을 읽는 순간, 파도 대신 통증이 떠올랐다. 허리디스크로 인해 한동안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했던 그 시절이 겹쳐 보였다. 30대 초반, 누군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침대에서 돌아눕지도, 혼자 걷지도 못했다. 2~3년 주기로 찾아오는 증상은 어느새 고질병이 되었다. 집에 어르신은 안 계신데도, 어르신용 지팡이만 여러 개 쌓여갔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이 꼬락서니로 뭘 하겠나' 싶은 말이 절로 나왔다. 우울했던 시간도, 울화가 치밀던 순간도 많았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그보다 더 많았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뭐라도 몸을 위해 해보자는 마음으로 척추 위생 스트레칭부터 시작했고, 어느새 수영에 진심이 됐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오늘 할당량을 못 채우면 밥줄이 끊긴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통증의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으로 통증을 다스릴 기회를 매일 노렸다. 모든 통증을 잡을 수는 없어도, 강도만이라도 줄여가며 하루하루 살아내고 싶었다. 큰 통증 앞에서는 순순히 백기를 들었고, 작은 통증을 이겨낸 날엔 혼자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통증은 또 밀려올 테다. 이쯤 되면 반려통증이라 불러도 좋겠다. 평생 함께할 존재라면, 적어도 내 기분까지 지배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마음을 갖느냐,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는 통증의 크기가 아니라 내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다. 언제나 통증은 나를 기다리지만, 때로는 내가 먼저 그 통증 위에 올라타기도 한다.


오늘도 물 위를 글라이딩하며 다가올 파도를 살핀다. 내일 어떤 통증이 밀려오든,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올라타 볼 참이다. 파도를 기다리는 건 서퍼만이 아니다. 나도, 오늘부터, 서퍼의 자세를 배운다.


쭉ㅡ 스르르ㅡ 슈욱ㅡ




[헤엄치듯 읽는 법]

자유형의 참맛은 글라이딩에 있다. 힘을 빼야 더 멀리 나가듯, 에세이도 밑줄 긋고 분석부터 하려 들면 오히려 리듬이 끊긴다. 흘러가듯 읽다 보면 어느 문장 앞에서 불현듯 멈추게 된다. 좋은 문장은 파도처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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