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전부다

비 오는 날, 나를 레인 앞으로 떠민 것들

by맛있는 하루

우르르. 쾅쾅. 쏴아아아.


비가 왔다.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다. 걸어서 오가면 발목 통증도 다시 올라오지 않을까. 하루쯤은 쉬어줘야 근육이 붙을 시간도 생기는 거 아닐까. 오늘은 수영가지 말고 쉬자,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엄마, 뭐해? 안가? 빨리 가방 싸."


가방 싸는 것을 밍기적거리고 있으니 아들 녀석이 재촉했다. 모범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얼른 가방을 쌌다. 등교하는 아이와 함께 수영장으로 향하는 루틴이, 이럴 때는 은근히 도움이 된다.


우산을 쓰고 걸었다. 무거운 장우산이 무색하게도 거센 비바람이 옷을 다 적셨다.


촤악!


지나가던 자동차가 물웅덩이를 밟으며 흙탕물을 사방으로 튀겼다. 도로 가장자리를 걷다가 순식간에 종아리까지 흙탕물이 튀어 흠뻑 젖고 말았다. "아, 진짜." 낮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먹구름 잔뜩 낀 하늘은 아침인데도 저녁처럼 어두웠다. 우두둑우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산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바람은 우산을 뒤집기 일보직전이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레인 앞이었다. 어찌저찌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수영복을 입고 물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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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독 회원님들이 없었다. 원래도 붐비는 곳은 아니지만, 4개 레인에 단 두 분뿐이었다. 수영장에 오기 싫다며 인상을 쓰던 또 다른 자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룰루랄라, 나만을 위한 수영장이라니. 몹시 귀찮았지만, 비바람을 뚫고 집을 나온 보람이 있었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스트레칭. 입수. 발목 돌리기. 글라이딩을 천천히 길게 하며 워밍업했다. 물살을 가르는 감각을 느끼며 몸에 슬슬 시동을 걸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체온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웠던 물이 어느새 시원하게 다가왔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때부터 멍때리면 안 된다. 스마트워치가 없으니 수동으로 바퀴수를 세야 한다. 헷갈리면 처음부터 다시 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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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넷. 다섯. 여섯... 열 다섯. 자유형 뺑뺑이를 마무리하고 '홍길동 잠영'을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잠영이나, 실상은 바닥에서 손을 몇 번 허우적대는 게 전부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평영 발차기를 배우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해본다.)


그래서 누군가가 무슨 연습하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잠영'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냥 바닥에서 놀아요"라고 답하고, 속으로는 '홍길동 잠영'이라는 나만의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을, 잠영에 가져다 붙인 셈이다.


잠영이든 홍길동 잠영이든, 어푸어푸 다섯 바퀴를 끝내고 물속 걷기까지 야무지게 하고 나왔다.


'안온다고 떼쓰다가 오니깐 더 개운하네.' 이런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역시! 오늘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한결같네. 그래, 젊어서부터 그렇게 운동을 꾸준히 해야지."


반신욕을 하시던 어르신들이 나의 성실함을 칭찬하셨다. 오늘 아침의 내 모습은 비밀에 부쳐야겠다.


장석주 시인은 산문집 <가만히 웃고 싶은 오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무수한 '시작'들을 품고 흘러간다. 연애의 시작, 여행의 시작, 사업의 시작, 배움의 시작들이 그런 것들이다. 창업과 건국도 시작이 있고, 우주의 탄생도 '빅뱅'에서 시작되었다. 시작을 시작하라! " _p.90, 장석주, '시작과 끝에 대하여', <가만히 웃고 싶은 오후>


오늘 수영의 가장 큰 고비는 다름 아닌 '시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것. 수영장 가방을 싸는 것. 아니, 수영장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그 순간. 시작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이미 가장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라커룸으로 돌아와 젖은 수영복을 정리했다. 창밖을 보니 빗줄기가 한풀 꺾여 있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 거셌던 비바람이 문득 고맙게 느껴졌다. 나를 레인 앞까지 떠민 건, 어쩌면 그 비바람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시작은 반이 아니다. 시작이 전부다.


내일도 비예보가 있다. 내일 아침에도 아들 녀석은 어김없이 수영 가방을 재촉할 테고, 나는 또 한 번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나설 것이다. 그렇게 시작을 시작하다 보면, 어느새 스무 바퀴를 다 돈 내가 서 있을 것이다.




[헤엄치듯 읽는 법]

수영의 8할은 물에 들어가기 전, 현관문을 나서는 그 순간에 있다. 바카라도 다르지 않다. 첫 페이지를 펼치기까지가 가장 무겁고, 일단 펼치면 문장은 저절로 흘러간다. 시작이 어려운 이유는, 시작 자체가 이미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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