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달려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장마가 반가워진 이유

by맛있는 하루

우르르쾅. 쏴아ㅡ. 장대비가 내린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절기상 소서(小暑)다.


소서(小暑): 작을 소. 더울서. 7월 7일 무렵으로, 작은 더위 속에 장마가 찾아오는 때를 말한다.


학창시절에는 비 내리는 날이면 슬픈 드라마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감수성이 폭발했다. 질퍽해진 등굣길, 젖은 양말, 눅눅한 공기. 알록달록한 풍경 대신 회색빛 세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슬픔은 종종 짜증으로 번지기도 했다.


출산 후에는 흐린 날이면 온몸이 쑤셨다. 허리디스크 통증이 심해졌고, 발바닥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듯한 저림도 함께 찾아왔다. 일기예보보다 빠른 셀프 기상예보는 몸보다 마음을 더 괴롭했더. 비가 내리면 한여름에도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수영에 빠지고 나서부터는, 눅눅한 비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다.


왜일까.




예전에는 비가 오면 유독 축축한 장소들이 먼저 떠올랐다. 옷장 안쪽에서 슬며시 번지던 곰팡이, 지나가던 차량이 튀기는 흙탕물, 여기저기 고인 빗물로 미끄러운 실내. 신발장에서 풍기던 쿰쿰한 냄새까지. 축축함이 곧 불쾌함이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런데 딱 한 곳, 눅눅함이 반가움으로 뒤집히는 장소가 생겼다. 바로, 수영장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온다. 바깥이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그 습기가, 수영장에서는 이상하게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샤워기에서 쏴아아 시원하게 물이 쏟아진다. 염소 냄새 가득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신기하게도 몸이 상쾌해진다. 밖의 축축함은 무겁게 가라앉는데, 이곳의 축축함은 가볍게 튕겨 오른다. 같은 물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밖의 비가 나를 짓누른다면, 수영장의 물은 나를 띄우는 부력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마자 숨을 훅 들이마시게 되는 습기와 무더위. 우산 밖은 장대비, 우산 안은 땀비였다. 거센 비바람에 우산을 써도 옷이 다 젖었다. 그럼에도 수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단지 화단에 누군가 심어 놓은 수국이 활짝 폈다. 분홍빛, 하늘빛 수국이 빗방울을 품고 웃는 듯했다. 축구를 하고 온 아들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듯, 꽃들도 쏟아지는 빗물을 시원하게 즐기고 있었다. 바지가 다 젖도록 '비멍', '수국멍'을 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금 수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엄청 오는데도 오셨네요."

"짝짝짝~!"


루틴 끝판왕 회원님. 옆 레인에서 턴을 하려다 멈추고, 인사와 함께 박수를 쳐주셨다. 오늘도 루틴을 지켰다는 걸 서로 확인하는, 루틴 회원들만의 반가운 인사법이다.


ChatGPT Image 2026년 4월 7일 오후 03_27_47.pngAI 생성 이미지 활용


수영장 반투명 천장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후두둑, 후두둑. 물살을 가르는 첨벙임과 뒤섞여 묘한 화음을 만든다. 킥판 차는 소리, 턴을 하며 물을 튀기는 소리, 저 멀리 누군가의 웃음소리까지 더해지면 수영장은 그 자체로 작은 오케스트라가 된다. 나는 레인 끝에 잠시 멈춰 서서 천장을 올려다본다. 빗방울이 유리를 두드리며 그리는 무늬를 눈으로 좇는 것. 이것이 바로 나만의 '비멍'이다.


김신지 작가는 <제철행복>에서 비 오는 날을 이렇게 표현한다.


"비 오는 날에만 잠시 열렸다 닫히는 풍경이 있다. 호수를 초록 카펫처럼 덮은 연잎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나 한옥 숙소의 누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산안개 같은 것들. 그 풍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빗소리는 반가운 노크일 것이다. 창밖으로 희우, 기쁜 비가 온다." _ p.170, 김신지, <제철행복>


예전의 나에게 비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비는, 달려가고 싶은 핑계가 되었다. 우산을 챙기다가도 문득 웃음이 난다. 젖을 걸 알면서도 기꺼이 나서게 되는 곳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장마철을 견딜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장마는 큰 피해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란다. 빗소리를 듣는 모두가 '희우'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기를. 무엇보다, 비 내리는 풍경을 편안히 바라볼 수 있는 자신만의 '비멍당'을 하나쯤 찾을 수 있기를.


비가 오면, 나는 이제 그곳으로 달려간다.




[헤엄치듯 읽는 법]

봄, 여름, 가을, 겨울만으로는 다 누리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1년을 24절기로 나눠 살아보면, 그 틈새마다 '이 맛에 살지' 싶은 장면들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오늘은 장마 속 수영장이 그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눈앞의 절기를 놓치지 않고, 제철 행복을 하나씩 늘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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