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배운, 화를 참지 않고 흘려보내는 법
"더이상 학원 못 다니겠어."
"왜?"
"나 혼자 할래.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꾸 숙제를 안 해왔다고, 통과를 못 했다고 남으라고만 해. 이제 못 하겠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학원가 한복판에 살면서 학원을 끊겠다니. 선생님이 떠먹여 주는 것도 겨워하는 녀석이 혼자 하겠다니.
시뻘건 분노가 엄지발가락 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5, 4, 3, 2, 1.
"야!! 그게 무슨 말이야! 니 성적에 혼자 한다는 게 말이 돼?"
"엄마랑 같이 할 거 정하고 확인하면 되잖아!!"
엄마 화산이 폭발했다. 아들 화산도 지지 않고 분화구를 열었다. 시뻘건 화산재가 천장까지 치솟고, 집안 곳곳으로 용암이 흘러내렸다. 남편과 큰아이는 서로에게 눈짓으로 재난 경보를 보내더니, 각자의 방으로 대피했다.
다 터지지 못한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키다 보니, 몸이 먼저 아우성을 쳤다. 소화불량에 허리는 뻐근하고, 심장은 조여 왔다. 밤새 골골거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일단 수영장으로 향했다.
물에 들어가 자유형으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온몸 구석구석에 쌓인 화가 롤링을 할 때마다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발끝에 남은 열기는 격한 발차기로 물속에 흩뿌렸다. 뭉친 화를 마저 풀기위해 자유형 뺑뺑이를 격렬하게 돌았다. 헉헉헉.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을 즈음, 몸을 뒤집었다. 천천히 배영으로 바꿔 탔다.
반투명 천장 너머로 하늘이 살짝살짝 비쳤다. 귓가에 남은 건 물살 가르는 소리뿐, 엉켜 있던 생각의 가닥이 그제야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몇 바퀴는 벽에 기대 가만히 몸을 식혔다. 차가운 물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희망 같은 것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지 조카였다면 짐을 싸서 도망이라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낳은 자식 앞에서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수영장에서 이미 반쯤 식혀 놓은 감성 스위치를, 집에 돌아와서는 아예 꺼버렸다. 그리고 이성 스위치만 남겨두었다.
혼자 해보겠다는 아이의 마음은 이미 정해진 뒤였다. 다만 자기주도학습을 온전히 감당하기엔 아직 무리였고, 그렇다고 엄마의 도움까지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오히려 나였다. 이제 와서 내가 다시 수학을 붙잡고 아이를 가르치기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렇다면 일타 강사를 집으로 데려오자. 며칠에 걸쳐 인터넷 강의를 비교하고 분석했다. 커리큘럼을 대강 머릿속에 넣은 뒤, 아이와 마주 앉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인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한 지 딱 열흘. 학원 숙제를 간신히 따라가며 헉헉대던 녀석이, 요즘은 스스로 '순공(순수 공부시간)' 시간을 챙긴다. 하루 일과를 마칠 때면 구두 테스트나 백지 테스트로 그날 배운 것을 함께 점검한다. 처음엔 이 방법이 맞나 싶어 불안했는데, 열흘을 지나 보니 조금씩 믿음이 쌓이고 있다.
"선생님은 화내거나 분노하십니까?
"저는 자주 화내고 분노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엉망이고 음침한 감정을 분출할 수가 있고, 그래야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거든요." _p.102, 위화, <산곡미풍>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는 산문집 〈산곡미풍〉에서, 화와 분노란 참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야 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억누르기만 하면 몸이 먼저 병든다는 걸, 나는 그날 소화불량과 허리 통증을 겪으며 배웠다.
화를 참는 대신 흘려보내는 나만의 방법은, 다름 아닌 물속이었다. 롤링으로 어깨를 풀고, 발차기로 열기를 내보내고, 배영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아들에게 두고두고 곱씹을 말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며칠간 이어지던 비가 그쳤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씻은 듯 파랗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화산은 아이가 아니라, 내 안에 오래 쌓여 있던 불안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스스로 해보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반항'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물속에서 몸을 뒤집으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반항이 아니라 성장통이었다.
화를 흘려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이는 지금 자기만의 속도로 공부를 하고 있고, 나는 불안이 차오르면 일단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늘도 뺑뺑이를 돌고 나서야 하루를 시작할 마음이 생겼다. 흘려보내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위화의 문장과 지난 열흘이 함께 알려주었다.
[헤엄치듯 읽는 법]
아들과 크게 부딪힌 날, 나는 화를 참는 대신 수영장으로 향했다. 롤링과 발차기, 배영으로 몸속 화를 흘려보내고 나서야 냉정하게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으니, 각자 화를 흘려보낼 자기만의 물길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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