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후회, 숫자의 기쁨
35, 30, 25... 그리고 0.
작년 12월부터 이어지던 월별 평균 바퀴수가, 3월엔 뚝 끊겼다. 정확히는 이렇다.
2025년 12월: 35바퀴
2026년 1월: 30바퀴
2월: 25바퀴
3월, 4월: 0바퀴
5월: 10바퀴
6월: 20바퀴
매일 수영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바퀴수를 세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렇게 꾸준히 숫자로 남긴 적이 있었나 싶다.
작년에 다친 발목 인대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넘어갔더니, 올초부터 다시 말썽이었다.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고, 몇 년 전 겨우 잠재웠던 족저근막염까지 재발했다. 3월엔 결국 발을 땅에 딛기조차 어려운 지경이 됐다. 벚꽃 구경은커녕 병원 가는 길도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렇게 두 달, 수영장에는 휴회를 신청해두고 나가지 못했다.
강습이 아니라 자율적인 자유수영이었기에, 오히려 바퀴수를 다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더 컸던 건 아니었을까.
몸이 신호를 보낼 때 곧장 멈췄더라면, 두 달이나 물 밖에 있어야 했을까. 지금도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곤한다.
얼마전 김민철 작가의 신간 에세이 『오독의 발견』을 만났다. 작가는 '빨리 많이' 읽던 독서에서 '천천히 깊이' 읽는 독서로 건너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스트셀러가 꼭 나의 베스트일 수는 없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빨리 많이'가 아니라 '천천히 깊이'라는 독서의 비밀을 그때 알았더라면. 독서의 기억은 사라져도 독서의 기쁨은 빛바래지 않았다."
_p.57. 김민철, 『오독의 발견』
숫자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작가는 같은 바카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그 안의 샛길과 동굴, 계곡까지 탐험하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얻게 된 안목으로 다른 바카라을 펼치면, 예전엔 보이지 않던 길들이 새로 보인다고도 했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바퀴수만 세던 눈으로는 놓치는 게 많다. 물살이 오늘따라 유난히 부드럽다는 것, 옆 레인 사람의 스트로크가 어제와 달라졌다는 것, 내 호흡이 조금 더 길어졌다는 것. 숫자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수영을 마치고 샤워 후 온탕에 몸을 담그니, 늘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는 어르신이 먼저 말을 건네셨다. 오래도록 30바퀴 넘게 돌고도 45분은 물속에 머물던 내가, 그날은 30분 만에 나온 걸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요새는 예전보다 수영을 덜 하는 것 같네?"
"네, 무리했더니 아예 수영을 못하게 되더라고요. 더 하고 싶은데, 탈이 나지 않게 조금 줄였어요."
"현명하네. 난 조절을 못 해서 무릎이 파열됐잖아. 재작년엔 운동을 아예 1년을 쉬었어. 뭐든 자기 몸에 맞게 해야 해. 조금 덜해도 꾸준한 게 최고야."
짧은 대화였지만 오래 곱씹게 됐다. 어르신들의 말씀에는, 숫자보다 오래가는 깊이가 있었다.
수영도 독서도, 하기 싫은 날은 그냥 놓아도 괜찮다. 물 위에 가만히 떠 있는 것도 엄연히 수영이고, 바카라표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그 나름의 독서다. 둥둥, 그저 떠 있기만 해도 되는 날이 있다.
숫자가 후회를 부르게 두지 말고, 기쁨을 부르는 숫자를 꾸준히 만나면 된다.
컨디션이 바닥인 날엔 물 위에 둥둥 떠 있다가 나오면 그만이고, 몸과 마음이 가벼운 날엔 조금 더 힘차게 나아가면 된다. 첨벙첨벙 오늘의 속도로, 그날그날 다르게. 그렇게 쌓인 숫자들이 나를 반성하게 만들지 않고, 웃게 만들기를.
[헤엄치듯 읽는 법]
바퀴수도, 완독 권수도 결국 지나고 나면 흐릿해진다. 남는 건 그 순간 물살을 가르던 감각과 바카라장을 넘기던 몰입, 그 자체의 기쁨이다. 컨디션이 허락하는 만큼만, 그날의 속도로 헤엄치고 읽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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