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기대감을 사러 갔다
"여름 내내 일했으니, 날 위한 선물 하나 정도는 사도 되지 않나. 신발을 살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흥분감이 있다. 어떤 순간을 제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발을 들고 계산대로 걸어가는 동안 느끼는 설렘일 수도 있고, 직원이 결제를 진행하는 동안 신발이 곧 내 것이 될거라는 기대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 옷장 안 다른 신발들 옆에 새 신발을 나란히 놓는 순간이거나. 아니면 두말할 것도 없이 처음으로 새 신발을 신고 외출하는 순간이거나. 남편에 비해 내 외모는 평범할 지 모르지만, 이 신발을 신는 순간 나는 비로소 화려한 주인공이 된다." _p.58, 프리다 맥파든,『더 티처』
다작하는 작가 프리다 맥파든의 『더 티처』 한 장면이다. 명품 구두를 편집광적으로 수집하는 주인공 이브가 기분 전환 삼아 구두 매장에 들렀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진열대 위 구두는 마침 그녀의 사이즈였다. 벤치에 앉아 신어만 보기로 했는데, 발에 꼭 맞았다. 정말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을까. 결국 그녀는 또 구두를 샀다. 그녀의 심리 묘사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건 뭐, 씻수 같잖아?
'씻수'란 수영 커뮤니티에서 쓰는 은어로, '씻으러 수영장에 간다'는 뜻이다. 수영장 샤워실의 수압은 집보다 세고, 물 온도도 더 뜨겁다. 그래서 집에서만 씻으면 왠지 개운하지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며 허리를 살짝 삐끗했다. 밤새 잠도 설쳐 정신이 헤롱헤롱했다. 오늘은 수영을 패스할까 하다가, 이왕 씻어야 하는 거 수영장에 가서 씻고만 오자고 마음을 바꿨다.
신발을 벗는 순간부터 염소 냄새에 코가 벌렁거렸다. 한우 갈비찜도 아닌데, 이 냄새는 왜 이렇게 맛있게 느껴지는 걸까.
샤워실 키를 받고 탈의실로 들어가는 동안, 분명 씻기만 하려던 마음은 어느새 설렘으로 바뀌어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나보다 최소 스무 살은 많은 수영장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인사 한마디에 기분이 훌쩍 올라갔다. 아까 삐끗했던 허리도 침 한 방 맞은 것처럼 신기하게 가벼워졌다.
"오늘은 일찍 왔네?"
"네~ 고딩이 개학했어요. 이제 살 것 같아요."
"축하해. 방학 동안 고생했네. 개학날 기분 좋게 수영하라고 오늘은 아무도 없다. 얼른 들어가봐."
씻으러만 왔는데, 염소 냄새는 유난히 향기롭고 레인마저 텅 비어 있다니. 이브가 신발 매장에 들렀을 뿐인데 진열대 앞에 자기 사이즈가 놓여 있었고, 신어보니 꼭 맞아서 결국 사게 된 그 흐름과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브는 자신을 신데렐라에 비유했고 나는 물개에 비유해야 한다는 것 정도. 이브가 계산을 기다리며 신발이 곧 자기 것이 될 순간을 기대했다면, 나는 물을 가르며 아직 몸속에 자리 잡지 못한 척추기립근을 곧 만나게 될 순간을 기대하며 수영복을 입었다.
결국 설렘도 기대감도, 무언가를 '갖게 되는' 순간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는 과정에서 태어나는 감정이었다. 신발을 사기로 결심한 순간의 두근거림과, 몸이 물살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순간의 기다림은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았다.
오늘 아침엔 수영장으로 가지 못할 이유가 충분했다. 삐끗한 허리, 설친 잠. 좋아하는 일도 가끔은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엔 수영이라는 커다란 덩어리를 통째로 마주하는 대신, 잘게 쪼개는 편을 택하는 것은 어떨까?
탈의실로 들어서는 발걸음 하나, 락커 문을 여는 소리 하나, 친구의 인사 한마디처럼. 쪼개어 보면 좋아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좋아했던 건 어쩌면 수영이 아니라, 수영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자잘한 순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헤엄치듯 읽는 법]
설렘은 물에 들어가기 전, 기대감은 물속에서 몸이 열리는 동안 온다. 좋아하는 일을 미루고 싶은 날일수록, 그 일을 잘게 나눠 하나씩 다시 사랑해볼 것. 바카라도 수영도, 완주보다 그 사이의 순간들이 늘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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