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129일 차 - 병든 자들로부터의 도피?

<감람산에서 2>

byHomo ludens

[타인의 시선과 위장의 기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가진 정신적 풍요로움과 행복이 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자극이자 상처가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천박한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눈부신 본모습을 감추고 '죽마를 타거나 겨울의 외투를 껴입어야 하는가'라는 서글픈 자문에 빠집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영혼을 찢어발기지 못하도록 황금을 삼킨 자처럼 나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가? 내 주위에 있는, 이러한 질투하고 비방하는 모든 자들이 나의 긴 다리를 보지 못하도록, 나는 죽마를 타야만 하는가?

황금을 삼킨 자는 밀수꾼이나 도둑이 발각을 피하려 금화를 삼켜 몸속에 숨긴다는 통속적 표상을 차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질투(Neid)는 그 금을 꺼내기 위해 배를 가르는 칼로 형상화됩니다. 즉 타인의 시기심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면의 보물(그의 영혼, 그의 행복)을 향한 폭력적 침탈 행위로 그려집니다.

죽마는 조금 더 역설적입니다. 죽마는 통상 사람을 더 크게, 더 눈에 띄게 만드는 도구인데, 여기서는 정반대로 "긴 다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은폐 도구로 쓰입니다. 이미 자연히 긴 다리(탁월함)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저 사람은 원래 크다'라고 인지하고 질투합니다. 그런데 명백히 인공적인 죽마를 덧대면, 큰 키의 원인이 '타고난 본성'에서 '눈에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장치'로 치환됩니다. 은폐란 안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참된 원인을 가짜 원인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기술이라는 것이 이 비유가 함축하는 논리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나의 행복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재난과 겨울의 곤궁함과 백곰 가죽 모자와 눈 내리는 하늘의 외투로 나의 행복을 감싸 숨기지 않았다면!

재난과 겨울의 곤궁함은 그에게 일어나는 일, 즉 비자발적으로 감수하는 조건입니다. 반면, 백곰 가죽 모자와 눈 내리는 하늘의 외투는 그가 걸치는 것, 즉 자발적으로 취하는 의상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장 뒷부분에서 "그들 앞에서 한숨짓고 추위에 이가 떨리는 척하며, 참을성 있게 그들의 동정 속에 나 자신을 감싸이게 둔다"라고 말합니다. 즉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겨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전시할지 말지, 어떻게 전시할지를 선택함으로써 은폐를 능동적 자기 연출의 기술로 바꿉니다.

어떤 자에게 있어서 고독은 병자의 도피를 말한다. 다른 자에게 있어서 고독은 병자들로부터의 도피를 말한다.

이 아포리즘은 소급적으로 앞의 모든 은폐와 위장을 정당화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은 세상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저 병든 영혼들의 질투와 동정으로부터 자신의 건강(=행복)을 지키는 선택이라는 것이 그의 자기규정입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고독은 선택이며, 진정한 창조자는 언제나 세상의 병폐로부터 물러나 이 위대한 고독 속에서 탄생합니다.


René_Magritte_-_The_Lovers_(Les_Amants)_1928.jpg<연인들>, 르네 마그리트, 1928

마그리트의 그림 속 두 연인은 젖은 천으로 얼굴을 꽁꽁 감싼 채 서로에게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흔히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의 소외와 단절, 혹은 서로를 가로막는 은폐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비극적 메타포로 해석되곤 합니다. 얼굴을 가린 행위는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길을 차단하고, 결국 관계를 불통과 고립으로 몰아넣는 부정적 방어기제로 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그리트가 포착한 이 은폐의 비극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지닌 피할 수 없는 실존적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황금을 감추고 죽마와 백곰 가죽 모자를 걸쳐 입었듯,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시기심 어린 칼날과 상처로부터 자신의 가장 순수한 내면을 보호하기 위해 얇은 천이나 두꺼운 외투를 겹겹이 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마그리트의 연인들이 얼굴을 가린 채 입을 맞추는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서로에게 결코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다가갈 수 없는 비극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타인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보인다는 것은 곧 나의 가장 연약한 목을 상대의 칼날 앞에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친 풍파 속에서, 때로는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도 결코 벗을 수 없는 각자의 '천'과 '외투'를 겹겹이 껴입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차라투스트라에게 고독이 병든 세상으로부터의 능동적 도피였듯, 우리가 타인에게 전부를 보여줄 수 없는 이 근원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질투와 폭력적인 시선 속에서 나의 영혼이 찢어발기지 않도록 지켜내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슬프고도 위대한 자기 보호의 성채입니다. 진정한 창조와 내면의 성장은 바로 이 건널 수 없는 간극과 은폐의 한계 속에서, 오직 홀로 피어나는 고독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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