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나가기에 대하여 1>
차라투스트라는 겨울의 고독을 노래하며 산속 동굴로 돌아가는 길에 큰 도시의 성문 앞에 이릅니다. 이때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어릿광대(schäumender Narr)가 두 팔을 벌려 그의 길을 막습니다. 민중이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Zarathustras Affe)라 부르는 이 광대는 긴 연설로 도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늘어놓으며, 그런 곳에서 "잃을 것뿐"이니 도시에 침을 뱉고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민중이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라고 부르고 있던 바로 그 어릿광대였다. 그가 차라투스트라의 화법에서 표현과 억양 얼마간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즐겨 그의 지혜의 보고로부터 지혜를 빌려 썼기 때문이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상가 주변에는 언제나 그를 얄팍하게 흉내 내는 '모방자'들이 꼬이기 마련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원숭이'와 '어릿광대'로 칭하며, 진정한 내면의 고뇌와 창조성 없이 남의 언어와 억양만을 차용해 지혜로운 척하는 자들의 허영을 비판합니다. 대중은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채 겉포장만 번지르르한 가짜 권위에 열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버멘쉬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랬듯, 대중 앞에서 웃음거리 혹은 고통스러운 수치를 겪으며 '원숭이'와 '어릿광대'로 비치기도 합니다. 대중들의 어려움은 자신들 앞에 서있는 이가 자신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위버멘쉬인지 그들의 모방자인지를 구분하는 일입니다.
저들은 서로를 뒤쫓고 있지만 어느 방향으로 뒤쫓아야 할지는 모른답니다. 서로 열을 내게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들은 함석을 두드려 소리를 내며 금화로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도 하지요.
독일어 hetzen은 사냥개를 풀어 짐승을 몰아대는 동사입니다. 도시인들은 서로에게 사냥감이자 사냥개인 경쟁의 순환 회로 안에 있습니다. "방향을 모른다"는 것은 목적의 상실입니다. 서문의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울 때가 되었다"는 요청과 맞물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가 목표는 없는데 속도만 남은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이들은 서로를 부추겨 달아오르게 하지만 내적 필연성이 없습니다. 동기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좀비처럼 값싼 금속이든 값비싼 금화든 상관없이 소리 나는 것으로 달려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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