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 : 희망이란 무엇인가 | 1장.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HOPE : 희망이란 무엇인가 | 1장.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창밖을 세차게 때리던 빗줄기가 기세를 멈추고 이제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비 갠뒤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만큼 투명했다. 딸 아이는 방에서 담요를 챙겨나왔다.
딸: “아빠, 근데 희망이 있으면 절망은 없는 거야? 희망이 있는 사람한테도 절망이 찾아와?”
우리는 흔히 희망과 절망을 빛과 어둠처럼 양극단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삶에서 배운 것은, 이 둘은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빠: “아주 중요한 걸 물었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도 절망은 반드시 찾아온단다. 아니, 오히려 희망을 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절망을 더 자주 만날지도 몰라.”
딸: “에이, 그건 너무 슬프잖아. 희망을 가지면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왜 절망을 더 자주 만나?”
딸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아빠: “얘야, 밤하늘에 별이 언제 가장 잘 보이는지 아니? 낮에는 햇빛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지. 아주 깊고 어두운 밤이 되어야만 비로소 별이 자기 빛을 내기 시작하잖아. 희망도 그 별과 같단다. 절망이라는 어둠이 깊어질 때, 비로소 희망이라는 별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거든.”
딸: “그럼 절망은 희망을 보여주려고 온 거야?”
아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절망은 우리가 가진 헛된 기대들을 다 태워버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만 남겨주는 불꽃 같기도 해. 아빠도 예전에 공부할 때나 회사에서 큰 실수를 했을 때,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절망을 느낀 적이 있었어.”
나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이에겐 정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아내의 산후우울증이 깊었을 때, 우리 가족을 덮쳤던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꺼내기가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밑바닥을 찍고 나서야, 우리는 아주 작은 일상인 함께 밥을 먹고, 아이를 씻기는 일이 얼마나 큰 희망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아빠: “절망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단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하지만 동시에 그 약함을 인정할 때 얼마나 큰 용기가 생기는지를 말이야. 절망은 희망의 적이 아니라, 희망이 뿌리를 내리는 토양인 셈이지.”
딸: “토양? 절망이 흙이라는 거야?”
아빠: “그래. 씨앗이 땅 밑 어둡고 축축한 흙 속에서 견뎌야 싹을 틔우듯이, 우리 마음의 희망도 절망이라는 시간을 통과해야 더 단단해진단다. 절망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희망은 유리처럼 약해서 작은 충격에도 깨지기 쉽지만, 절망을 이겨내고 피어난 희망은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법이야.”
딸아이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딸: “그럼 아빠, 절망 속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해? 별이 보일 때까지 그냥 참고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빠: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절망 속에서도 아주 작은 빛 하나를 찾아내려고 애를 써야 한단다. 그건 아주 사소한 거여도 좋아. ‘오늘은 밥이 맛있네’, ‘내일은 해가 뜰 거야’ 같은 작은 믿음 말이야. 그 작은 빛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다 보면 어느새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온단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빠: “독일의 시인 횔덜린은 이런 말을 했어.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하는 힘도 또한 자라난다’고. 우리가 가
장 힘들고 위험하다고 느끼는 그 절망의 자리에, 사실은 우리를 구해줄 희망의 힘이 이미 함께 자라고 있다는 뜻이지.”
딸: “절망이랑 희망이 같이 자란다고? 신기하다. 그럼 둘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쌍둥이 같은 거야?”
아빠: “그렇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듯, 절망과 희망은 늘 등을 맞대고 있단다. 우리가 절망의 캄캄한 그림자 속에 서 있을 때, 사실 우리 바로 뒤에는 희망이라는 빛이 비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절망의 끝에서도 결코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단다. 고개를 들고 몸을 돌려야만, 나를 비추고 있던 그 빛을 발견할 수 있거든.”
딸: “아빠, 그럼 나도 나중에 슬픈 일이 생겨서 절망하게 되면, 별을 찾는 것처럼 희망을 찾아볼게. 어둠이 깊
을수록 별이 더 잘 보인다고 했으니까!”
아이의 대답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내가 막아줄 수 없는 수많은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별을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아이는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아빠: “그래, 우리 딸. 절망은 결코 끝이 아니야. 그건 네가 더 큰 희망을 품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란다. 기억하렴,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야 가장 찬란한 아침이 온다는 것을.”
마당 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하루종일 구름에 가려있던 태양이 산의 능선 너머로 완전히 몸을 숨긴 뒤였다.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어오며 세상은 서서히 푸른빛이 감도는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비에 젖은 땅 위로 낮게 깔린 어둠은 차가웠지만, 그 습기를 머금은 공기 덕분에 대지의 숨소리는 오히려 더 가깝게 들려왔다.
나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쥐며, 낭성의 어스름한 들판을 응시했다. 이 시간은 빛이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임을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절망은 결코 희망의 빈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눈부신 희망이 잉태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요한 인고의 시간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제 몸을 한껏 펼쳐내어 온 세상을 덮어야만 비로소 숨어있던 별들이 선명한 빛을 발하듯, 우리 삶의 고단한 터널 또한 그저 지나쳐야 할 고통이 아니라 희망의 진정한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