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절 :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희망

HOPE : 희망이란 무엇인가 | 1장.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by마광훈


창밖으로 낮은 산등성이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거실 깊숙이 들어온 볕 줄기 사이로 눈에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바카라상 앞에 앉아 낡은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고, 딸아이는 베란다 창틀에 턱을 괴고 한참이나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딸: “아빠, 희망은 어디 있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거야?”


아이의 질문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대개 내가 평생을 고민해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 본질적인 것들이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이 추상적인 단어가 아이의 작은 손바닥 위에 실감 나게 내려앉을 수 있을까. 나는 문득 창가를 흔드는 얇은 커튼을 가리켰다.


아빠: “좋은 질문이네. 아빠도 너만 할 때 할머니께 그렇게 묻곤 했어. 얘야, 저기 커튼이 살랑거리는 게 보이니?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렇게 커튼을 흔들며 분명히 존재하잖아. 희망도 그 바람과 아주 비슷하단다.”


딸: “근데 바람은 나뭇잎이 흔들리거나 내 머리카락이 날리면 보이잖아. 희망은 그런 게 없는데?”


아이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이에게 희망은 실체가 없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단어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고, 지난 몇 달간 우리 가족이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빠: “아니, 희망에도 흔들림이 있어. 엄마가 몹시 힘들고 지쳐 있을 때도, 다시 너희를 위해 웃으려고 애쓰는 모습 본 적 있지? 그리고 네가 가끔 투정 부리는 동생의 손을 먼저 잡아줄 때 말이야. 아빠 눈에는 그게 바로 희망의 흔들림처럼 보여. 우리가 손으로 꽉 잡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움직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거지.”


딸: “그러면 희망은 우리 마음속에만 숨어 있는 거야?”


아빠: “마음속에만 있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해. 희망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누군가의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할 때 비로소 ‘있다’라고 말할 수 있거든. 과학적으로 보면 바람도 공기 분자가 실제로 이동할 때 느껴지잖아? 희망도 그렇게 움직임 속에서만 실재하는 거란다.”


나는 바카라상 모서리에 놓여 있던 종이비행기를 집어 들었다. 며칠 전, 비가 오던 날 딸아이와 함께 삐뚤삐뚤하게 접어두었던 것이었다. 종이는 이미 군데군데 구겨져 있었지만, 비행기의 형상은 단단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빠: “이 종이비행기를 한번 날려볼까?”


나는 가볍게 손목을 스냅 하며 비행기를 허공으로 던졌다. 비행기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거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딸아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딸: “어, 떨어졌다! 실패!!”


딸아이는 어디선가 본 듯 프로그램 진행자의 말투를 흉내 냈다.


아빠: “오호? 허허. 그래, 실패했지. 그런데 너는 왜 방금 ‘실패했다’고 말했을까?”


딸: “음… 당연하잖아. 아빠가 던졌을 때 더 멀리, 훨씬 높이 날아갈 줄 알았는데 금방 떨어졌으니까.”


아빠: “맞아.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실패라고 말해. 그런데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이 종이 조각이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갈 거라고 믿었다면, 그건 희망일까 아니면 욕심일까?”


딸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딸: “음… 욕심 같아.”


아빠: “그렇지. 희망은 현실과 단단히 맞닿아 있어야 해. 종이비행기가 날 수 있다는 건 진짜 가능성이지만, 영원히 날 수 없다는 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야. 희망은 그 현실의 토양 위에서 가능성의 바람을 타야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거지.”


딸: “아빠는 너무 진지해! 같이 안 놀고 싶어. 근데 아빠, 그럼 희망이랑 꿈은 뭐가 달라? 꿈은 자면서도 꿀 수 있고, 아무거나 다 상상할 수 있잖아.”


나는 아이다운 투정과 예리한 구분, 어울리지 않는 반응을 동시에 보이는 아이를 보며 내심 놀라며 미소를 지었다.


아빠: “정말 좋은 구분이야. 꿈은 아직 바람이 불기 전의 고요한 숲 같은 거야.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멈춰 있는 상태지. 반면에 희망은 그 정지된 꿈에 우리가 숨을 불어넣는 순간 시작되는 거란다. 꿈이 아름다운 정적인 그림이라면, 희망은 그 그림 속 주인공이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동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네.”


딸: “아, 그래서 희망은 살아있다고 하는구나!”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 들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여린 줄기들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 “저 꽃들 봐. 바람이 없을 땐 가만히 서 있지만, 지금은 춤을 추듯 흔들리잖아. 우리가 바람의 형태를 보지는 못하지만, 저 움직임을 통해 바람이 존재한다는 걸 확신하게 되지. 희망도 그래. 눈으로 그 형태를 볼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설 때, 그리고 타인을 향해 따뜻한 손을 내밀 때 우리는 비로소 희망의 형체를 느끼게 되는 거야.”


딸: “그러면 희망이 있다는 건, 지금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네?”


아빠: “정확해. 희망은 결코 정지해 있지 않아.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바람을 만날 수 없단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우리가 마음을 열고 행동하기 시작할 때, 희망이라는 바람도 우리 삶 속으로 불어 들어오는 거야.”


나는 언젠가 읽었던 고대 철학자의 문장을 떠올렸다.


‘희망은 깨어 있는 자의 꿈이다.’


그는 희망을 나약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개척하려는 강렬한 의지로 정의했다. 그 철학자의 지혜가 수천 년을 지나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도 전달되길 바랐다.


아빠: “옛날 아주 지혜로운 철학자 할아버지도 이렇게 말했단다. 희망은 그냥 눈 감고 꾸는 꿈이 아니래. 잠에서 깨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 가지는 꿈, 그게 진짜 희망이래.”


딸: “그러면 희망은 나도 직접 해낼 수 있는 거네!”


아빠: “물론이지. 너는 이미 매일매일 희망을 만들고 있어. 네가 동생에게 좋아하는 장난감을 양보할 때, 아빠 마음속엔 ‘아, 우리 아이가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구나’ 하는 희망이 피어올라. 희망은 어떤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이렇게 네가 실천하는 작은 행동들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단다.”


딸: “아빠, 근데 희망은 꼭 사람 사이에서만 있는 거야? 혼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어?”


아빠: “혼자서도 희망의 씨앗을 품을 수는 있어. 하지만 그 희망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야 해. 작은 불씨가 바람을 만나야 큰 불꽃이 되듯이 말이야. 혼자만의 희망은 외로운 촛불 같아서 작은 입바람에도 꺼지기 쉽지만, 가족과 친구, 마을이 함께 마음을 모으면 어떤 폭풍에도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된단다.”


딸: “아… 그러니까 희망은 혼자 태어나지만, 같이 살아가는 거네.”


아빠: “맞아. 바람도 한 곳에서만 머물면 미풍에 그치지만, 여러 방향에서 모여들면 바다를 건너는 큰 흐름이 되잖아. 희망도 그렇게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일 때 비로소 거대한 기적을 만들어내는 법이지.”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아빠: “그러니 꼭 기억해 두렴. 희망은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해. 바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그 흔적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일으켜 세우는 매 순간, 희망은 바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단다.”


딸: “응, 이제 알 것 같아.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거고, 내가 만들어서 우리 같이 키울 수 있는 거구나.”


아이의 목소리에는 이제 확신이 서려 있었다. 나는 다시 비행기를 주워 아이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아이가 직접 바람을 향해 비행기를 던졌다. 비행기는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래 허공을 머물다 바람을 타고 돌아와 내 발치에 내려앉았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서늘한 바람결에 나뭇가지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희망은 저 바람처럼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선한 움직임과 변화 속에서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은 가만히 눈을 감고 꾸는 정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의 가능성을 향해 기꺼이 흙바닥으로 발을 내딛는 동적인 행동이었다. 내 앞에 마주 앉은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비록 혼자서 작은 불씨를 지피며 시작했을지라도, 이렇게 서로의 마음이 닿아 관계라는 바람을 만날 때 희망은 비로소 꺼지지 않는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간다는 것을.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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