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도 나이도 뺀 뒤에 남는 것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리어왕은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자가 있는가?"
리어왕은 평생 자신을 왕, 아버지, 통치자라는 역할로 정의해 왔다.
그런데 왕권이 무너지고 딸들의 충성도 사라지자,
그는 갑자기 본인이 누구인지 말해줄 자를 묻는다.
그동안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체성을 잃자 비극적 감정 속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학부에서 영문학과를 다니는 동안에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관련 수업이 없었다.
오히려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용 축약본으로 읽었는데도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다음 주에 출간 예정인 바카라의 예약 배송을 주문해 놓고,
새 옷을 넣기 위해 예전 옷들을 정리하듯
아직 마저 읽지 못한 다섯 여 권의 바카라들을 주말에 몰아 읽다가(나는 여러 권의 바카라을 동시에 읽는다.)
나는 <리어왕>의 한 장면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왕이 던진 저 질문에 누가 대답할 수 있었을까?
"Lear's shadow."
"리어의 그림자입니다."
광대가 대답한다.
우문현답에 순간 감탄과 웃음이 피식 났다.
의문사와 관계대명사를 한껏 쓴 '왕'의 거창한 질문에
'광대'가 문장도 아닌 소유격으로 수식된 한 단어로 핵심을 찔러버렸다.
광대는 왕에게 '너는 자신이 남긴 껍데기와 잔상만 붙들고 있다'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왜 남에게 묻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못)는다.
하지만 질문보다 더 깊은 층위를 건드린 답이리라. 그 한 단어 안에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으니까.
누구든 언제든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맬 수 있다.
그건 왕이든, 아저씨든 피해 갈 수 없다.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잃었다가 다시 찾으려 할 수도 있다.
리어왕의 질문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리어왕은 자신의 '역할'(명사,자기가 맡은 바카라임이나 임무, 또는 슬롯적 지위나 위치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행동과 기능)을 묻고있다.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역할을 묻고 있는 것이다.
길을 다시 똑바로 찾아 생각해보면
정체성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답이다.
여기 한 가지 팁이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동사형으로 정의하면
'내'가 주체가 되어 외부와 상관없이 내 정체성을 만들고 지켜갈 수 있다.
차라리 리어왕이 자신을 '통치하는 사람'정도 만이라도 정의했다면
저 상황 속에서 조금은 자기 자신을 덜 잃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살아갈 방법마저 갈피를 잡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란 여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사, 원장, 작사가, 엄마, 아내
이런 명칭은 역할일 뿐이다.
언젠가 사라지는 완장 같은 것.
남에 의해 사라질 수 있는.
심지어 끌려갈 수 있다는 것.
다만 내가 맡고 있는 역할들이나 원하는 삶을 통해 그 공통점을 동사화 시킬 수 있다.
나는 '관찰해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이 생각을 한 뒤에 바로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조각상은 이미 대리석 안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투박한 대리석 속에 이미 존재하던 피에타를 정밀하게 드러낸 후 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관찰한 것을 언어라는 도구로 조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학생을 관찰해 그 학생이 영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강의로 영어 문장을 읽고 어떤 단어와 문장구조인지 드러내주는 사람이다.
삶과 사람을 관찰해서 가사로 의미를 드러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하루의 장면들을 붙잡아 의미를 찾고, 그것을 글로 남긴다.
어쩌면 나는 끊임없이 '연결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경험과 오래전 기억을, 한 사람의 이야기와 인간 본성을, 우연한 사건과 삶의 의미를 연결하면서 살아간다.
삶은 설명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한 만큼만 세상을 보고,
관찰과 언어는 보이지 않던 본질을 드러낸다.
정체성이 생기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발산한다.
그 발산이 메시지가 되고,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지 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정체성을 찾는 시작점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보다
"나는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있다.
나는 관찰해서 드러내는 사람이다.
나의 눈으로 관찰하고,
나의 언어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람.
영어 문장을 관찰해 단어와 구조, 의미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드러낸다.
삶과 사람을 관찰해 감정과 의미를 가사로 드러낸다.
돌아보면 내가 하는 일은 모두 비슷했다.
가르치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가사를 만드는 일도.
결국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었다.
관찰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드러내는 것.
지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은 그것에 가장 가깝다.
나는 관찰을 통해 사람과 삶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정체성을 정체성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그 정체성을 발산한다. 그 발산이 곧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메시지가 강해지면 더 눈에 띄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제공한다. 정체성을 명확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지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필요할 때 사람들이 찾도록. '나는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정체성을 찾는 시작점으로 삼아야 한다.
가르칠 때도,
글을 쓸 때도,
가사를 만들 때도.
내가 하는 일은 어쩌면 창조가 아니라 발견에 가깝다.
그리고 발견한 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언어로 드러낸다. 학생에게는 영어를 해석해 주고,
독자에게는 삶을 해석해 주고,
청자에게는 감정을 해석해 주고,
구독자들에게는 말씀을 해석해 준다.
그리고 언젠가 혹시 리어왕처럼 정체성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가 오면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봐야겠다.
'나는 평생 반복해 온 동사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