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뒤에야 이해한 크랭의 정체
작년 이맘때였다.
남편이 출장으로 필라델피아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짐꾼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봤다.
영어를 못하는데 부장님과 단둘이 출장을 가야 한다며 걱정하길래
나는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처럼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내 비행기표도 (네 회사 경비로)끊어달라는 과감한 제안을 했다.
물론 미국에 가본 적 없는 영어강사의 미국 진출 계획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렇게 남편은 출장을 영어 공부 따위 없이 다녀와서 길에서 마약 중독자들 본얘기를 하며 미국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곤 며칠 뒤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남편이 미국 출장에서 이번 주 돌아왔다고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워싱턴 D.C. 에 살고 있는 큰 외삼촌께서
본인이 버스 타고 필라델피아 정도는 금방 갈 수 있는데 왜 연락을 안 했냐며
크게 서운해하셨다는 것이다.
미국에 간다고 하면 으레 친척들에게 연락 한 번쯤 하는 법인데, 남편은 부장님 의전하느라 일정에 정신이 팔려 그런 생각조차 못 했다.(사실 나도 말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한동안 큰 외삼촌 가족과 함께 살았었다.
큰 외삼촌은 젊은 시절 미군부대에서 일하다가 교포였던 외숙모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미국에 정착했지만, 사업 문제로 몇 년간 다시 한국에 들어와 지내게 되었고
그 기간에 나는 큰 외삼촌, 외숙모, 사촌오빠, 사촌동생과 한 집에서 생활했다.
그 당시 교포 사촌들과 지내면서 나는 미국 초등학생의 생활을 간접 체험했다.(한국어 패치로)
비디오테이프로 미국 만화를 보고, 한국 슈퍼에는 없는 알록달록한 시리얼을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인이 된 내 머릿속에 그 당시 열심히 보던 만화 캐릭터가 자꾸 떠올랐다.
<Teenage Mutant Ninja Turtles>였는데,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영웅인 닌자 거북이들도 아니고,
바로 빌런인 '크랭'이었다.
몸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분홍색 뇌.
크랭은 혼자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래서 배 부분이 투명하게 뚫린 거대한 인간형 로봇 슈트 안에서 산다.
하지만 행동에 대한 지시는 크랭이 내리고 인간의 몸체는 거의 따르기만 한다.
거대한 몸체는 힘을 쓰고 움직일 뿐,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크랭이다.
심지어 크랭은 영어 단어 'cantankerous'가 떠오를 만큼 성질도 고약했다.(사실 수업시간에 친분있던 교수님이 이 단어 설명하시면서 장난으로 딱 나 같다고 하셔서 잊을 수가 없다.)
배 속에 뇌가 들어 있는 거대한 인간이라니.
어린 내 눈에는 기괴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자꾸 떠오르는 건가 했는데
곰곰히 생각하다 어느 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그 외형만 보였는데
김장 김치가 시간이 지나며 발효되듯,
내 머릿속에도 쌓였던 것으로 무언가가 생겨났다.
생각해 보면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 삶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는 욕망, 본능, 두려움, 결핍이다.
마치 크랭이 로봇 슈트를 조종하듯 말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은 자신이 로봇 슈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크랭이라고 믿는다.
내가 의식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결정 뒤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본능과 욕망이 먼저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선택은 이미 보이지 않는 조종석에서 내려진 명령일지도 모른다.
로봇 슈트는 말한다.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 운동해야지."
"오늘은 바카라도 읽고 영어 공부도 해야지."
하지만 조종석 안의 크랭은 다른 생각을 한다.
에너지를 아끼고 싶다.
움직이기 싫다.
당장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크랭은 영웅이 아니라 빌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안의 본능 역시 대부분 영웅보다 빌런에 가깝다.
성장보다 안정을,
도전보다 익숙함을,
미래의 보상보다 지금의 편안함을 원한다.
그래서 인간은 종종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조종석 안의 크랭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크랭이 1차원적으로 단순하고 나쁘기만 한 빌런은 또 아니다.
크랭은 게으르고, 투덜거리고, 안전한 곳만 찾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살아남기도 한다.
위험을 감지하고, 에너지를 아끼고, 당장의 손해를 피하려는 것도 모두 크랭의 역할이다.
문제는 크랭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크랭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를 알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크랭을 이용할 수도 있고, 살살 달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운동하러 가자."
라고 명령하는 대신,
"딱 10분만 걸어보자."
라고 설득할 수도 있다.
"영어 공부해야지."
가 아니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재미있는 글 하나만 읽어보자."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크랭은 의외로 강압보다 협상에 더 잘 넘어간다.
그래서 이 만화에는 크랭만 등장하지 않는다.
영웅인 닌자거북이들도 등장한다.
심지어 핑클, 블랙핑크처럼 4명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닌자거북이들은 인간 '외부'에 있는 또 다른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닌자 거북이랑 손을 잡을지 말지는 슈트 입은 인간인 나의 의지에 달렸다.
본능이 아니라 가치.
충동이 아니라 방향.
편안함이 아니라 의미.
닌자거북이의 역할은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이다.
크랭이 아무리 투덜거려도,
결국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닌자거북이들과 손잡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평생 자신이 크랭이라고 착각한 채,
사실은 크랭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 슈트로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그저 액션 만화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그 안에 인간을 움직이는 본능과 의식의 이야기가 숨어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 40년 된 만화 시리즈가
인간에 대한 꽤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본 지 30여 년 만에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닌자거북이를 보던 전세계의 초딩들이
그 심오한 의미를 알아보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