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을 하고 싶었던 아이가 알게 된 것

건물주 말고 자리주 되는 방법

byLayla Lee

내 콧등 위에는 다여섯 살 무렵 생긴 흐릿하고 긴 흉터가 있다.

동네 골목에서 사람들 앞에서 이것저것 재주를 부리며 놀다가 넘어져서

생긴 흉터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사람들이 귀엽다며 호응해 주자 신이 났고,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 나서다가 넘어져 콧등에 상처가 생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생긴 딱지가 간지러워서 긁다가 흉터가 남았다.


이 흉터는 너무 오래전부터 있어서 이제는 상처라기보다 원래부터 내 얼굴에 있던 선처럼 느껴진다.

마치 타고난 본성처럼.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드러났던 나의 특징 중 하나는,

'나서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본능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티비를 많이 보다 보니 아역배우도 되고싶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선생님한테 반장 안 뽑냐고(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패기 넘치는 1학년이었다.

하지만 1학년은 반장을 뽑지 않는다는 대답을 듣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 읽어볼 사람? 하면 가장 먼저 손들고

매 해 반장을 하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내내 나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반에서 가장 앞에 서는 것.

반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야 했다.


하다 하다 중학교 때는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서(이건 학생회 담당 선생님이 권유해서 한 일이긴 하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선거운동에 사활을 걸었고, (친근감을 위해 몸빼바지 코스튬을 하고)

부회장에 당선되자 엄마에게 부탁해서 반 친구들에게 롯데리아 햄버거를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처럼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외향적인 편이어도

사실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100% 즐겁고 쉬운 일로 느껴지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스스로에게 '가만히 있자'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그렇다기엔 이때도 동아리 예술제에서 뮤직비디오 주인공하고, 무대에서 춤이고 노래고 다 하긴 했지만.)


특히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자 최대한 조용해지는 길을 택했다.

남한테 보여줄 정도로 나한테 뭐가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매번 나설까 말까 고민해야 할 때가 있었지만 나섰을 때 소득이 없는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보다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렇게 내 마음속 방향을 안으로 누르는 다짐을 해가며 10대 후반과 20대를 보냈다.

그랬더니 마치 퇴화을 겪은 동물처럼

대학교 조별발표도 싫고

성인이되어 수업이나 강연 후에 질문시간이 되면 혹시나 한마디라도 해야할까봐 참 부담스러웠다.

가만히 그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게 습관이되었다.



나는 그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나섰을 때의 진짜 소득은 박수도, 인기나 인정도 아니었다.

역할이었다.

반장이 되면 반장으로서 행동해야하고

학생회 부회장이 되면 부회장으로서 살게된다.


물론 그때는 저 역할 때문에 해야 하는 일들이 짐처럼 느껴졌었다.



오래된 격언처럼,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헬스장에 등록하면 운동하고

스터디를 만들어서 공부한다.

역할이 생기는 순간 사람은 생각보다 성실해진다.


하지만 2,30대 때 나는 환경보다 '의지'가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었다.

그래서 그 흔한 스터디그룹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의지가 강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의지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목표가 있다면

의지를 키우는 것보다

먼저 그 역할을 맡아버리는 것이 빠를 때가 있다.

자리가 생기면
행동이 생기고,

행동이 반복되면

그제야 성격이 된다.


김미경 강사의 바카라에서

SNS에 개인 채널, 계정으로 브랜딩 하는 것을

온라인 건물주가 되는 것이라고 묘사해서

읽다가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꼬마 빌딩도, 빌라도 건물주는 건물주잖아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환경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건물주가 아니라 자리주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운동을 하고 싶다면 운동하는 자리를 만들고,

공부를 하고 싶다면 공부하는 자리를 만들고,

글을 쓰고 싶다면 글 쓰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리주 되는 방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스스로 환경을 설정해 두고

본인을 거기에 가두는 것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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