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 시작된 저의 개인적인 상상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리스트의 야상곡 3번 내림 가장조 62-1을 들으시며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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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지금 내 위에서 번쩍이는 빛이 나의 앞코에 맞부딪혀 내 매끈한 몸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녹색 몸, 단단한 가죽, 푹신한 밑창. 내 옆에는 나와 비슷한 모양새지만 색이 다른 친구들이 늘어서있다. 우리는 그렇게 주인을 기다린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신발’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나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무언가인가 보다.
몇몇 사람들은 나를 신어보고, 다시 벗고, 다른 사람을 불러 260, 280과 같은 숫자들을 말한다. 나를 데려가지는 않는다. 조용히 내 밑창을 바라보니, 나는 270이라고 쓰여있다. 내 숫자를 말하는 사람이 나를 데려갈 것인가, 나는 묵묵히 나의 몸에 꼭 맞는 사람을 기다린다.
어느 평일 오전, 직원이 하품을 하며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젊은 남자와 중년의 여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턱에 대고,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내 앞코를 쓰다듬는다. “색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엄마.” 그는 여자를 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는 나의 녹색 몸을 한껏 뽐내며, 불빛 쪽으로 조금 더 움직였다. 나보다 먼저 주인을 찾은 친구들이 알려준 조언으로는, 불빛에 비치면 더 근사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여기요, 이 신발로 주세요.” 여자가 직원을 보고 말했다. 매일같이 하품만 쩍쩍하고 있던 직원이 아침부터 이게 웬 횡재냐 싶었는지, “네, 손님~”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정성껏 포장했다. 가끔 먼지떨이로 내 코를 퍽퍽 쳐서 나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늘만큼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대하는 것이 낯설었다.
상자에 담겨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나의 주인이 된 남자가 웃는 소리, 그의 엄마가 조곤조곤 말하는 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잘 쓸게요, 엄마.”
“취업 선물이야. 취업 축하해, 아들.” 여자의 따뜻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취업 선물이구나, 왠지 뿌듯했다. 남자는 이제 나와 함께 일을 나가겠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자부심이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며칠간 상자에 담겨 깜깜한 곳에 갇혀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 있던 적은 처음이라 답답했지만, 남자를 기다리며 그 답답함을 견뎌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을까,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 감긴 눈앞이 노랗게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조심스레 떠보니,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안함과 설렘을 모두 품고 있었다. 아, 드디어 나도 땅에 입맞춤하고, 걸어 다닐 수 있겠구나,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의 발을 내 안으로 집어넣었다. 따스하고 가벼운 발이 내 몸에 딱 맞았다. 형언할 수 없는 자유로움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검은색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걷는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행복한 느낌이었다. 거칠거칠한 땅의 질감,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따스한 공기, 내 앞코로 내리쬐는, 인위적인 불빛이 아닌 자연의 하얀색 햇빛,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선택해 준 나의 친구와 함께하기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그는 회사에서 거의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다. 푸른색 불빛이 나는 네모난 무언가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손으로 작은 네모들을 쳐대기만 했다. 회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곳은 정말 재미가 없는 곳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어두컴컴한 회사 바닥에서 잠을 자거나 옆에 있는 우산과 대화를 하곤 했다. 우산도 지루하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와 그는 몇 년을 그 회사라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에 다녔다. 그는 주말엔 나를 벗고, 좀 더 가벼운 신발을 신었기에, 나는 주말엔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만 잤다.
어느 저녁, 그는 서둘러서 회사를 나섰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집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하철에 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그가 도착한 곳은 한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서 두리번거렸는데, 나는 주인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발에서는 땀이 나고 있었다! 발이 뜨끈하고 축축해서 양말에 습기가 차고, 그러다 보니 나의 안쪽 천도 후끈거리는 공기에 젖어있었다. 그 느낌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 이유가 있겠지,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앉은 곳의 맞은편에는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하얀 피부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여자였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그녀의 신발, 아니, 하이힐에게 물었다.
“여기 왜 온 거야?” 나는 남자의 땀 때문에 몸이 축축해져서 짜증이 난 상태였고, 얼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머, 남자신발이네. 몰라, 내 주인이 오랜만에 나를 신더라고. 원래 불편하다고 잘 안 신거든.” 힐이 대답했다.
우리는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주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깔깔 웃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대화를 나누고, 여자는 애교를 부렸다. 점점 발의 땀이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식사 후엔 그는 여자의 손을 잡고, 집에서 더 먼 곳, 여자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의 볼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 후로도 남자는 몇 번이고 그 여자를 만났고, 1년 동안 회사가 끝나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이제 집에 가는 것보다 그녀를 보러 가는 게 더 익숙했다. 특히, 그 하이힐, 그녀를 하도 자주 봐서 친구까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들이 설레하고, 사랑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다시 사랑하는 모습을 거의 매주 지켜보았다.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나는 남자의 결혼식을 보지는 못했지만, 남자가 가진 구두 중 가장 비싼 녀석이 결혼식에 다녀온 날, 신발장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결혼식에 대해 하도 떠들어 대느라, 그가 얼마나 활기찼는지, 행복했는지 우리 모두는 알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한 후, 나는 더 큰 신발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처음 만났던 하이힐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여자의 신발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잘 지내보자며, 웃음꽃을 피웠다. 1년이 더 흐른 후, 남자와 여자는 신발장을 열고 아주 작은 신발 하나를 넣어놓았다. 나와 다른 신발들은 그 신발이 너무 작고 귀여워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와, 넌 진짜 작다. 어디서 온 거야?”
“아기용품점에서. 나는 아기가 신을 거래. 아마 나는 빨리 버려지겠지만, 그래도 아기를 품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니?” 그 신발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높고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고, 그 후로 나는 몇 번 남자의 발을 품고 밖에 나가 아기신발을 신은 포동포동한 볼을 가진 아기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나의 몸은 상처가 나고, 많이 낡았지만, 남자는 나를 가장 아꼈다. 그는 매일 아침 나를 솔로 닦아주었고, 일을 나갈 땐 항상 나를 신었다. 가끔 주말에도 나를 신고 가족들과 놀러 나가기도 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나에겐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하얀 눈이 그의 집 앞마당에 두텁게 쌓이던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를 기다렸지만, 거의 한 달이 넘게 신발장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더 답답했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어느 아침, 신발장 문이 끼익-, 하고 열리고, 수염이 거뭇거뭇한, 살이 많이 빠져 보이는 그가 나에게 손을 뻗었다. 이젠 그도 중년의 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나를 붙잡고 바닥에 툭 내려놓고는 나를 구겨 신었다. 그의 뒤꿈치가 내 몸을 눌러서 아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이 더 아리고 힘들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출근한 곳은, 수없이 많은 돌들이 쌓여있고, 모래 먼지가 휘날리는 공사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돌을 나르고, 쇠막대기들을 날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나를 옥좼다. 몸에 튀는 돌의 파편들과 수많은 상처들, 그리고 먼지 때문에 빛나는 나의 녹색 몸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그는 그렇게 몇 달을 공사장으로 나갔다. 그의 몸이 힘들어하는 것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발은 퉁퉁 부어서 비명을 질렀고, 그의 허리는 조금씩 굽어졌다. 집에 돌아온 그는 나를 신발장에 넣지도 않고, 아무 데나 휙 던져놓았고, 가끔 여자가 나를 신발장에 도로 놓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한숨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쉬는 시간, 그는 점심을 사러 가다가 날카로운 돌에 내 몸을 긁혔다. 찢어질듯한 고통이 내 몸을 파고들었고, 몸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새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한참을 바라보고 만져보더니, 집에 와서 좁은 신발 상자에 나를 구겨 넣었다. 내 앞에 영겹의 어두운 시간이 들어선 순간이었다.
몇 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5년, 10년, 20년. 나는 아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가끔 아주 작은 빛이 새어 들어오기도 했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찢어진 내 몸처럼, 나의 마음에도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나의 주인이 보고 싶었지만, 그는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내 몸엔 회색빛 먼지가 눈이 내린 듯 잔잔하게 쌓이고, 나는 그것들의 포근한 품에서 나의 끝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아침, 깊은 잠을 깨우는 따스한 손길, 갑작스러운 그 손님에 난 드디어 눈을 살며시 떴다. 내 눈앞엔, 백발이 된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의 이마와 눈가에 자리하고 있었고, 작아진 그의 눈은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노인이 되어버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나를 품에 잠시 안았다가 솔로 나를 정성스레 닦았다. 그리곤 이젠 쭈글쭈글해진 자신의 발을 내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발은 전보다 작아진 것 같았다. 헐렁거리는 발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나를 신고 한참을 서있었다. 나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서 투명한 구슬이 떨어져 내 앞코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둥근 나의 표면을 따라, 그 따뜻한 구슬은 또르르 흘러가며 나를 감싸주었다. 그날, 그는 나를 다시 신발장에 넣었다. 그것이 나와 그의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더 흐른 뒤, 나는 신발장에서 다시 꺼내졌다. 내 앞에 보이는 사람은 나의 주인이었던, 백발이 노인이 아닌, 그의 아들, 어린 시절부터 내가 보아왔던, 이제는 중년의 남성이 되어버린 그 아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 옆에선 작은 여자아이가 “아빠, 아빠”하며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거친 손으로 나를 들어 올려 내 상처 난 몸을 쓰다듬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는 나의 찢어진 부분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색깔로 덧대주었고, 나를 잘 닦아서 처음 보는 신발들이 가득한 신발장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가끔씩, 나를 신고 밖에 나가 상쾌한 공기를 들이쉴 수 있게 해 주었고, 폭신한 땅을 밟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