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로 떠난 여행이 행복할리가 6
태국 중, 북, 남부를 아우르는 3주간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친한 친구를 만났다. 유럽에 다녀왔던 그 친구였다. 친구는 못 본 새 많이 탔다며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우리가 모인 곳은 고상한 분위기의 찻집이었다. 친구는 내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태국 여행은 재밌었어?”
“으, 응. 재밌었지.”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자랑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나 말이야. 치앙마이와 빠이에도 가고, 무꼬 쑤린에도 갔어. 무꼬 쑤린은 푸켓에서 버스로 8시간 달리고, 해안 마을에서 하룻밤 자야 갈 수 있는 곳인데…….”
“재밌었겠다.”
우리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친구가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태국에서 차는 많이 마셨어?”
우리는 차를 무척 좋아했다. 내게 차를 가르쳐준 게 그 친구였다. 어디선가 차를 배워온 친구가 나를 찻집에 몇 번 데려갔는데, 차의 달콤한 향, 예쁜 찻잔과 다구, 차를 마시는 행위의 우아함에 나는 푹 빠져들고 말았다.
아르바이트로 번 용돈을 쪼개서 찻잎을 사고, 홍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눔 받기도 했다. 넓고도 깊은 차의 세계가 재미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티백 홍차를 머그잔에 마시면서도 행복했다.
그런 나였으니, 여행 전에 태국에서 차를 많이 마시고, 많이 사오겠다고 큰소리를 친 것이다. 마침 태국은 한국보다 차를 많이 마시는 국가이기도 했다. 태국 전통 밀크티, 차옌은 어디에서나 파는 국민 음료였다. 길가와 쇼핑몰에서도 태국에만 있는 브랜드를 흔히 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나는 태국에서 차를 잔뜩 마셨다. 기대했던 차옌은 정말 맛있어서, 3주 내내 입에 달고 살았다. (심지어 한 잔에 20바트밖에 하지 않았다!) 여러 찻집에 방문했으며, 내가 마실 것과 선물을 포함해 찻잎도 제법 샀다. 짜뚜짝 시장에서 300바트에 예쁜 핸드페인팅 찻잔도 살 수 있었다. (이 찻잔은 지금도 우리 집 장식장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왜였을까? 내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많이 마셨지. 음……. 립톤 홍차도 마셨고.”
태국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비싸서 할 수 없는 활동을 많이 시도해 봤는데, 그중 하나가 페디큐어였다. 푸켓의 한 네일숍에서 나는 페디큐어를 받았다. 내가 직접 바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솜씨였지만, 그래도 더운 날씨에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쉴 수 있었고 한국에선 불가능할 가격이었다.
거기서 서비스가 끝나고 홍차를 줬다. 차갑게 식힌 립톤 홍차였다. 쓰고 떫고, 향은 별로 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처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친구가 깔깔 웃었다.
“뭐? 립톤 같은 거 말고!”
순간 가슴이 쪼그라든 나는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당연히 립톤만 마신 건 아니었지. 차옌도 맨날 마셨고, 찻집도…….”
내 여행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그 친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헤어지는 길, 나는 나의 여행, 그리고 그 친구의 여행에 대해서 생각했다.
처음부터 지기 싫어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비교를 멈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격차가 메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게 가능했던 여행을 실제로 겪고 나니, 오히려 친구와 나 사이의 차이는 더욱더 벌어진 것만 같았다.
「영국 음식은 정말로 맛이 없었어. 하지만 애프터눈 티세트는 맛있었어.」
나는 친구가 말했던 영국 애프터눈 티세트와 내가 마셨던 립톤 홍차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말 느긋한 여행이었어. 도시마다 사흘은 있었고, 일정은 오전과 오후에 한 개씩뿐이었어.」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고, 일정을 전부 구겨 넣으려면 무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공항에서 노숙을 해봤고, 푸켓에서 방콕까지 나이트 버스로 이동했다.
푸켓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한없이 걸었던 것이 떠올랐다. 땀은 비 오듯 흘렀고, 발이 아팠지만 택시는 탈 수가 없었다. 걷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푸켓의 태양 아래에서 걷는 것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지치고 힘들어서, 순간순간 내가 여행을 오고 싶어 한 게 잘못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난 주제에 안 맞는 욕심을 부린 대가를 치른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에게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그 생각이 절정에 달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가야만 했다. 이미 시간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나는 손을 들어 툭툭을 멈춰 세웠다.
“수완나품 공항으로 가주세요!”
툭툭 기사는 30대 중후반 정도의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끄덕이더니 캐리어를 툭툭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드는 시간, 적당히 막히는 찻길을 달리는 툭툭에 몸을 실은 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적당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시선이 느껴진 나는 문득 백미러를 보았다. 툭툭 기사는 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그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는데도, ‘나쁜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직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툭툭 기사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왔다. 한 손은 운전대에 얹은 채로 다른 한 손을 뒷좌석을 향해 내밀어 치마 아래로 드러난 내 발목을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털부터 등골까지 털이 쭈뼛 섰다. 이토록 불쾌한 성적 접촉은 처음이었다.
불쾌할뿐더러, 무서웠다. 당장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운전대는 그의 손 안에 있었다. 툭툭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항의했다가 혹시 그가 화를 내면?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면? 그렇다고 그만두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운전 중인데도 그의 한쪽 손과 정신은 온통 나에게 와 있었다. 이러다간 사고가 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나는 손에 쥔 캐리어 손잡이를 들었다 놓았다. 쿵! 큰 소리가 났고, 그는 화들짝 놀라더니 발목에서 손을 떼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심한 항의 뒤, 우리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내 심장은 타들어가듯 쪼그라들었다.
‘혹시 화가 나서 엉뚱한 곳으로 가면 어떡하지?’
머릿속에 평생 보아왔던 납치 사건 기사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부디 무사히 공항에 갈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그는 납치 같은 걸 시도할 정도의 패기가 없는 잡범에 불과했다. 툭툭은 수완나품 공항 입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가 멋쩍은 얼굴로 다가와 캐리어를 내려주었는데, 그때 나는 동전 몇 개를 바닥에 던졌다.
“이봐!”
그가 태국어로 뭐라 소리쳤다. 나는 낑낑대며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그가 다가와서 날 때리거나 뒷덜미를 잡을까 봐 무서웠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내 덜미를 잡아채는 영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동전을 주우러 다니느라 바빴고, 나는 곧 사람들이 있는 공항에 들어섰다.
이것이 여행 초기,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뛰는 일이었지만, 난 이 일에 대해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이 친구에게는.
‘그 여행에서 내가 행복할 수 없었다는 걸, 불행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어.’
지하철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내다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너에게만은…….’
질투심으로 시작한 여행이 행복해지는 일 같은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