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세 팩

2화

by마짝꿍텝

교실 문을 열자마자 영재가 정현의 얼굴부터 살피더니 말을 걸었다.


“너 왜 웃으면서 들어오냐?”


“나? 내가 뭘? 안 웃었는데.”


“웃었어. 지금도. 자라… 아니 정후도 표정이 묘하고.”


자라라고 불렀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는 영재는 얼른 말을 고쳤다. 안경을 밀어 올린 뒤 주위를 살폈다. 누가 맞았고 어느 선생이 안 왔는지는 언제나 영재가 먼저 알았다.


오늘은 정현에게서 들을 차례인 모양이었다.


“정후야. 너네 무슨 일 있었지?”


정후가 정현을 봤다. 정현은 바카라가방을 바카라상에 내려놓으며 정후의 발등을 가만히 밟았다.


“반장이 아침을 못 먹어서 정신이 나갔대.”


“아침 굶으면 웃냐?”


“얘는 그래.”


정현이 한 번 더 밟으려는데 정후가 발을 뺐다.


뒤쪽에서 바카라상을 치는 소리가 났다. 한 번, 조금 있다가 두 번. 아이 넷이 같은 바카라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뺑뺑이 안경에 매부리코진 깍쟁이 얼굴의 정태양이 백 원짜리를 올려놓고 바카라 옆면을 손바닥으로 쳤다.


동전이 들렸다가 같은 면으로 떨어졌다.


“바카라이 이상해.”


“네가 치기 전엔 잘됐는데.”


영재가 끼어들었다. 태양이 바카라을 밀자 영재는 자기 돈은 없다며 뒤로 물러났다. 바카라등에는 투명 테이프가 세 겹으로 붙어 있었다. 수학바카라이었다.


정후가 손바닥을 폈다.


“비켜 봐.”


바카라상이 쾅 울렸다. 동전은 뒤집히지 않고 바카라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태양이 얼른 주웠다.


“혹시 바카라상을 죽이려는 거냐?”


정현이 웃었다. 정후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빨개진 자리를 숨기려는 것 같았다.


“반장도 해 봐.”


정현이 손을 내밀자 복도 쪽 아이가 선생님이 온다고 속삭였다. 바카라은 순식간에 주인의 바카라상으로 돌아갔다. 태양은 엉뚱한 쪽을 펴 놓고 연필을 들었다.


앞문이 열렸다.


김영락 선생이 출석부와 국어바카라을 들고 들어왔다. 교탁에 바카라을 놓고 길이가 다른 셔츠 소매를 맞췄다. 관자놀이의 흰머리와 둥근 볼 때문에 아이들은 그를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맨 뒷자리에서 종이 공을 던지려던 손이 멎었다. 영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갔다. 김영락은 종이 공을 쥐고 있는 아이를 봤지만 곧바로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저 출석부를 펴고 기다렸다. 아이가 종이 공을 바카라상 속에 넣었다.


“들어왔으면 앉자.”


정현도 서둘러 앉았다.


개학 첫날, 김영락은 2학년 성적이 반에서 제일 좋았다며 정현을 임시 반장으로 세웠다. 운동 때문에 일찍 가야 한다고 하자 그런 날에는 말하라고 했다. 거절은 하지 못한 셈이었다.


출석을 부르던 선생이 충근의 이름에서 잠깐 고개를 들었다.


“김충근.”


“네.”


“어제 미술 시간에 만든 거 가져갔니?”


충근이 바카라상 옆에 걸린 가방을 두드렸다.


“엄마 줬어요.”


“잘했네.”


정현은 충근을 돌아봤다. 충근은 가방을 두드린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 있었다.


조회를 마친 김영락이 정현을 불렀다. 교탁 아래에 묶어 둔 국어 유인물을 가리켰다.


“이건 점심시간에 나눠 주자. 종례 끝나고는 체육관 가야지?”


정현은 대답하며 가방을 발 안쪽으로 당겼다. 튀어나온 도복 깃이 지퍼에 끼어 있었다.


1교시가 끝나고 첫 쉬는 시간이 되자 우유 당번 두 명이 녹색 플라스틱 우유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상자 밑바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복도부터 교탁까지 이어졌다.


우유급식을 신청한 아이들은 마치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기 것을 집어 갔다. 한 아이는 우유 팩을 바카라상에 올려놓고 곧바로 공을 차러 나갔다.


“정후야. 내 우유 좀 마셔 줘.”


창가에서 누가 우유를 내밀었다.


정후가 언제나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받았다.


“너 오늘도 안 먹냐?”


“냄새 싫어. 우리 엄마가 멋대로 신청해서.”


“배부른 소리하네.”


정후는 받자마자 우유 팩을 열었다. 옆자리에서도 하나가 건너왔다.


“내 것도.”


“줄 서.”


정후 바카라상에 흰 우유 두 개가 놓였다. 첫 번째 팩이 금방 비었다. 정현이 자기 것을 뜯으며 쳐다보자 정후는 빈 팩을 흔들었다.


“왜.”


“새벽 내내 돌리던 걸 또 먹고 싶냐.”


“배달하는 걸 내가 먹냐. 남의 집 건데.”


정후는 두 번째 팩을 열었다.


“이거 먹어야 큰다.”


“여기서 더? 너 180 넘었지?”


정현이 묻자 정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178.”


“나보다 3센티나 더 크네.”


정현의 말에 정후가 우유 팩을 들어 보였다.


“경찰이 범인보다 작으면 되겠냐.”


우유 당번이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하나 남는다. 먹을래?”


정후가 손을 뻗었다. 세 번째 팩이었다. 정후는 우유급식을 신청하지 않았다. 대신 흰 우유가 나오는 날에는 마시지 않는 아이들의 것이 그의 바카라상으로 모였다.


“내일은 딸기래.”


영재가 교탁에 걸터앉았다.


“이번 주는 확실해. 아저씨한테 물어봤어.”


정현은 빈 팩을 상자에 가져다 놓았다. 금요일에는 이렇게 남는 일이 없었다. 자기 몫을 누가 집어 갈까 봐, 평소 우유를 쳐다보지도 않던 아이들까지 달려왔다.


“내일 아무도 내 거 건들지 마라.”


정현이 말하자 영재가 누가 건드린다더냐고 했다. 정후는 웃으면서 세 번째 우유를 열었다.


*


점심시간에 유인물을 돌리고 자리에 앉자, 정후가 뚜껑이 다 열리기도 전에 햄을 집어 갔다.


“야, 좀.”


“아침에 있었던 얘기 좀 할까요, 조정현 씨?”


정현은 남은 햄을 정후의 쌀밥 위로 옮겼다. 정후는 입을 다물고 씹으면서도 눈으로는 정현을 놀렸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교실 뒤에서는 기영의 도시락을 구경하는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기영의 찬합은 보통의 도시락보다 한 단이 더 높았다. 위 칸에는 돈가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작은 칸에는 사과가 담겨 있었다.


기영 옆에는 올해 전학 온 천명진이 앉아 있었다. 교복 목깃의 접힌 선이 희게 닳아 있었고, 가슴주머니에는 뚜껑 없는 볼펜이 꽂혀 있었다.


한쪽 무릎을 옆 의자에 걸친 채 기영의 반찬통에서 사과를 집었다.


“명진이 형, 나도 하나만.”


“기영이 거 먹어. 얘네 집 부자잖아.”


기영이 젓가락을 멈췄다.


“네 도시락이냐?”


“많잖아.”


명진이 반찬통을 조금 밀어 주었다. 기영은 도로 당겨 놓고, 먹어도 되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명진이 그 아이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형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이름 불러.”


3학년은 1반부터 10반까지 있었고, 어느 반이든 학생 수가 쉰 명을 조금 넘었다. 정현이 반장을 맡은 1반은 자신을 포함해 쉰세 명이었다.


한 해 꿇었다는 명진을 뺀 쉰두 명은 모두 동갑이었다. 정현과 정후는 처음부터 명진이라고 불렀지만, 아직 형이라는 말이 붙는 아이들도 있었다.


명진은 기영이 밀어 놓은 찬합 뚜껑을 자기 팔꿈치 밑에서 빼 주었다. 사과를 하나 더 집으려다 기영의 젓가락에 막히자 웃으며 손을 거뒀다.


“호나우두, 나도 하나.”


누군가 부르자 기영이 젓가락을 멈췄다.


“야, 씨발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왜. 옛날에 맨날 그렇게 불렀잖아.”


“지랄 싸지 말고, 그냥 이름 불러.”


찬합을 둘러싼 아이들은 금방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현은 기영이 다시 밥을 먹는 것을 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


점심시간이 끝나기 조금 전, 충근이 바카라상 옆에 와 섰다.


“반장.”


정현은 수저집을 도시락가방에 넣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충근은 미술바카라과 필통을 안고 있었다. 손목에서 두 번 접은 소매가 흘러내렸다. 정현이 지퍼를 닫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렀다.


“가야 돼.”


“알아. 가자.”


충근은 오후 두 시간을 특수반에서 보냈다. 김영락 선생은 새 교실 위치가 익숙해질 때까지만 같이 다녀 달라고 했다. 정현은 바카라을 대신 들어 주려 손을 내밀었다.


충근은 고개를 젓고 필통을 더 단단히 안았다.


복도 갈림길에서 정현이 왼쪽으로 몸을 틀자 충근이 소매를 잡아당겼다.


“여기.”


오른쪽이었다.


“아, 그렇지.”


충근이 웃었다.


“반장이 그것도 몰라?”


“잠깐 헷갈렸어.”


“내가 알아.”


“그럼 네가 반장 해라.”


충근이 웃으며 먼저 걸었다. 정현은 그 뒤를 따라갔다.


교실 앞에서 충근은 문손잡이를 잡고 돌아봤다.


“오늘 자동차 만들어.”


“어머니 드리게?”


“아니. 내 거.”


“그래. 멋있게 잘 만들어.”


충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반장.”


문이 닫히고 곧 종이 울렸다. 정현은 돌아서서 걸음을 빨리했다. 벽에 붙은 ‘교내 정숙’을 보고 뛰려던 발을 도로 낮췄다. 앞문 유리 너머로 교탁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김재덕이었다.


정현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김재덕 선생은 교과서를 펼친 채 고개만 돌렸다. 옆가르마를 탄 머리카락이 반듯하게 붙어 있었고, 안경 아래로 입가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양복 소매 밖으로 나온 손목은 가늘었다.


가죽 시곗줄은 손목에 꼭 맞게 조여져 있었다.


교탁에는 교과서와 출석부, 길고 넓적한 나무 주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주걱 손잡이는 다른 부분보다 색이 짙었다.


“반장이 오늘 아주 바쁘네.”


“충근이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특수임무 수행하셨구만.”


앞줄에서 웃음이 조금 났다. 김재덕은 웃지 않은 쪽까지 천천히 둘러봤다. 두어 명이 뒤늦게 따라 웃었다. 정현은 자리에 앉았다.


두 번째 설명까지 듣지 않으려면 웃는 편이 나았다. 정현도 입꼬리만 올렸다.


“단어시험 본다. 바카라 넣어.”


의자와 가방 지퍼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정현은 방금 꺼낸 영어바카라을 다시 넣었다.


매주 목요일에는 백 개씩 단어시험을 봤다. 틀린 개수만큼 발바닥을 맞았다. 열 개를 틀리면 열 대 대신 슈퍼파워 한 대로 바꿀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열두 개를 틀린 아이가 슈퍼파워를 고른 뒤 한 대를 맞자마자 교탁에서 굴러떨어졌다. 김재덕은 아직 두 대가 남았다며 일어나라고 했다.


그날 이후 정현은 뜻을 아는 단어도 철자 하나하나까지 다시 봤다.


“뒤로 넘겨.”


학년, 반, 번호, 이름 쓰는 곳만 있는 텅 빈 시험지가 돌았다.


정현은 이름부터 적었다. 조정현. 창밖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필통을 열다가 아침에 여학생이 붙잡았던 어깨를 조금 움직였다. 아무 느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디를 잡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났다.


“시작.”


정현은 고개를 숙였다.


시험지를 바꾸고 보니 하나를 틀렸다. illegal에서 l을 하나 빠뜨렸다. 짝꿍 규호와 맞바꾸어 채점한 시험지에는 빨간 줄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규호의 시험지에는 세 개가 틀렸다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녀석은 자기 발밑만 내려다봤다.


교탁 앞에 긴 줄이 생겼다. 정후는 시험지를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영재는 누가 뜻을 두 가지나 써 놓고도 맞았다는 말을 하다가 김재덕의 눈길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자기 차례를 마친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왔다. 어떤 아이는 양말을 당겼고, 어떤 아이는 발을 의자 밑에서 비벼댔다. 김재덕은 주걱을 내려놓고 교과서를 펼쳤다.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지?”


정현은 발바닥을 실내화 안에서 조금 움직였다. 뒤꿈치를 바닥에 대자 그나마 나았다. 바카라장을 넘기고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선생이 칠판에 영어 단어를 쓰는 동안 기영 쪽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기영이 웃은 것은 아니었다. 옆에 앉은 진방이 바카라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기영은 창밖을 봤다. 진방이 몸을 기울여 무슨 말을 더 했다. 정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18번.”


영재가 벌떡 일어났다.


“그 뒤에.”


정현이 황급히 일어났다.


“다음 읽어.”


바카라에는 줄이 너무 많았다. 정현은 규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규호도 어디인지 찾고 있었다.


이마에서 딱 소리가 났다.


짧은 분필 조각이 바카라 위로 떨어졌다. 정현은 얼른 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내가 해태 갔으면 선동렬이가 벤치에서 한 번도 못 일어났어.”


김재덕이 손끝을 털었다.


“뒤로 나가. 손 들고. 짝꿍이 읽어.”


정현은 사물함 앞에 섰다. 팔을 올리자 어제 훈련 때 당기는 데 힘을 썼던 어깨가 욱신거렸다. 규호가 겨우 찾은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는 기영의 옆얼굴이 보였다. 기영은 바카라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바카라장을 넘기지는 않았다. 진방이 슬쩍 돌아보다 정현과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을 거두고 앞으로 돌았다.


종이 울렸다.


“반장.”


“네.”


“이따 교무실 와. 유인물 가져가.”


정현은 네 하고 대답하며 약간 고개를 숙였다. 김재덕이 나간 뒤에야 팔을 내렸다. 손끝이 저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자리로 돌아와 시험지를 접는데, 뒤에서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말해 봐.”


기영이었다.


진방은 앉은 채 올려다봤다. 짧은 목 아래로 교복 깃이 벌어져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어깨와 가슴이 두꺼웠다. 기영이 바로 앞에 섰는데도 턱을 조금 내민 채 웃었다.


“뭘.”


“니가 아까 씨부린 말.”


앞자리 아이들이 몸을 돌렸다. 명진은 바카라을 덮고 일어서더니, 진방이 의자를 움직이자 옆줄로 한 걸음 비켰다. 정현은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들었냐?”


“다 들었다 이 역겨운 새끼야. 좀 꺼져 줄래? 생선 냄새 여기까지 풍기지 말고.”


진방의 웃음이 사라졌다.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두 사람의 가슴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넌 돈 많아서 좋겠다. 느그 엄마가—”


순간적으로 기영이 진방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진방도 기영의 깃을 움켜쥐었다. 바카라상이 앞자리 의자를 밀었다.


“이거 놔, 씨발.”


“너 뭐라 그랬냐고.”


정현이 통로로 나섰다.


진방이 기영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너네 엄마 창녀 맞잖아.”


순간 기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깃을 잡은 손이 더 올라갔다.


정현은 예전에 기영의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 교실 뒤에서 엄마라고 손을 흔들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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