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소깍을 경험하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듯이

by오션펌킨

오전에 일찍 출발해서 "숨, 도"를 둘러보고, 그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쇠소깍을 경유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오는 중에 급하게 예약을 했다. 나룻배 체험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예약을 하지 않으면 하루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안내 글을 읽고 나서 부리나케 예약부터 했다. 도착 시간에 딱 맞는 시간은 이미 예약이 끝났고 선착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나룻배를 탈 수 있었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익숙한 일이고 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한 시간 정도를 달려서 쇠소깍 정류장에 도착했다. 함께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우리와 목적지가 같았다. 여행자들은 여유로워 보였고, 우리도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부렸다.

쇠소깍 주변에는 하천을 따라 나무 데크 산바카라로와 전망대가 잘 조성되어 있어 걷기 좋았고, 제주올레 5코스의 종점이면서 6코스의 시작점이라 어떻게 여행을 하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관광명소였다. 하류로 내려가면 검은 모래와 자갈이 펼쳐진 쇠소깍 해변을 함께 둘러볼 수 있었다.

쇠소깍 해변은 주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쇠: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소(쇠)'

소(沼): 물이 깊고 고인 '웅덩이'

깍: 바다로 이어지는 '끝머리(마지막)'를 뜻하는 제주 방언


평화로움 그 자체인 풍경이다. 검은 돌들이 가득한 제주의 해변에 검고 고운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안전한 해수욕장이었다. 이 여행을 마무리할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제주는 할머니의 품 같은 곳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여행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에 제주도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들로 인해 제주 여행에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들이 물어온다. 여행할 때 괜찮았느냐고.

혼자 여행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던 나는 여행을 준비할 때도 좋았고 여행하는 내내 행복했다. 여행 막바지에 지인과 함께 한 여행까지도 오래오래 추억으로 이야기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행 중 안전에 대해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의 제주는 육지의 사람들에게 회피해야 할 여행지로 회자되고 있다.

쇠소깍 계곡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 싶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미 대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15분에서 20분 정도를 직접 노를 저어 계속 끝까지 갔다가 오는 단순한 경험을 위해 1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했지만 기꺼이.

에메랄드빛의 물속이 투명하게 다 들여다 보이는 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물속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입수를 해서 직접 물속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조용히 노를 저었다. 간혹 노 젓기가 서툴러서 당황하는 목소리나 당황한 상대방을 다독이는 말소리는 들려왔지만 모두 계곡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 심연을 들여다보느라 한눈파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병풍처럼 펼쳐진 돌 벽과 그 아래 조각난 암석들에 눈길이 갔다.

마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단단한 땅을 뚫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 같은 전설이 있을 것 같은 형상이었다. 물길의 모양도 그렇고 그 물길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이 용의 몸부림으로 조각나고 균열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체험을 신청한 사람들이 많아서 자칫 오가던 뱃머리가 서로 부딪히기도 했지만 다들 얼굴 찌푸리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능숙하게 뱃머리를 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부딪히고 멋쩍지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감대가 생긴 듯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암묵적 룰이 아니었나 싶다.

시작할 때는 노를 젓는 일에 서툴러서 원하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배가 나아가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는데 계곡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제법 익숙해서 원하는 곳으로 배를 몰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일부러 천천히 노를 저어 조금이라도 더 배 위에서 계곡을 즐기려고 했으나 출발지점에서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출발지점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던 곳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포기했다. 하지만 쇠소깍을 체험하고 나와서 가라앉지 않는 마음 때문에 주변을 더 서성거렸다. 쇠소깍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도록 둘레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그곳을 걸으면서 한 번 더 그 웅장함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매장에도 구경했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기념품 매장을 들어가는 것은 쉼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이템이 있어 조금 시간을 할애했다. 신기하고 귀여운 것들을 보면서 눈호강하고 나왔다.

쇠소깍 체험을 마치고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 위해 바닷가로 걸어 나왔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으며 돌아다녔더니 배가 많이 고팠다. 검색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식당이 그냥 맛집처럼 보였다. 고민할 필요 없이 들어가서 많지 않은 메뉴 중에서도 대표 메뉴를 주문했다.

물회와 보말죽, 부추전이었다.

평소 같으면 막걸리를 곁들였을 터인데 다음 여행이 남아 있어서 안전을 위해 막걸리는 포기했다. 신선한 해산물로 만들어서 재료의 본연의 맛을 깊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음식을 모두 남김없이 먹고 나왔다.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다음 여행지로 향했다.

늘 나의 여행에 목적은 따로 없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나면 많은 것들이 변해있다.

이번 제주 여행은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하느라 3년 간을 갇혀 살았던 나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와 함께 새로운 시작의 방점을 찍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조차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적정한 거리를 지키지 못해서 나의 슬롯생활의 영역에 문제가 생겼다. 함께 일을 하기로 했던 사람의 도덕적, 윤리적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드러내 놓고 토론을 하다가 결국 각자의 길로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와 관련된 지인들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소문을 내고 다니면서 뜻하지 않게 나의 행동에 설명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슬롯생활 자체가 관계의 연속인 것인데, 모든 사람을 평가하면서 사귈 수도 없고 한 사람을 온전히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세상이 아는 일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린 후에 마음 열고 사귈 수도 없는 일이니 이런 시행착오는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행착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험담을 하고 모든 상황을 본인 위주로 이해하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내는 일도 피곤하다. 그리고 왜 내가 그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설명하고 내 입장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회의적일 뿐이다.

처음에는 전투적으로 나의 진정성을 어필했다. 두 번, 세 번 반복이 되면서 의미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피로감을 주는 자리는 일부러 피한다. 어차피 진실은 지각쟁이다. 기다려 주는 수밖에 없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새로운 무언가가 펼쳐질 것만 같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다시 여행을 가야 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일단은 버티기로 했다. 그리고 일상을 지켜 나가다 보니 달팽이가 움직이듯 아주 천천히 일이 풀려 나가기는 한다. 그래서 가끔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릴 때는 여행할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추억을 소환해 내면서 평정심을 되찾곤 한다.

쇠소깍 계곡 안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배 위에서 거대한 우주를 들여다보면서 느꼈던 그 짜릿한 두려움을 떠올리면서 나약한 인간관계의 문제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관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