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을 품은 인공 정원에 수국이 만개하다.
보편적으로 세상은 약자를 돕고 배려하는 것이 기본 태도이다. 그 보편성이 여성이 남성보다 약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슬롯생활이 수월한 경우가 있다.
여성이 남성과 경쟁을 하게 될 때면 남성에게 핸디캡을 주는 경우도 있다. 철없던 시절, 이런 배려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해야 하고 그러려면 둘이 똑같아야 한다고 오기를 부린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리석었지만 한때 그런 오기로 버텨온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은 오히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올바른 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일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 녹아있는 편견이나 불합리한 것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처리하느냐가 그 인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고 다시 방향성을 잡아가는 중이다.
성장에 끝이 없고 성장의 완성은 평온한 죽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 제주 여행의 후미를 함께한 지인은, 한 번도 가족 이외의 사람과 여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늘 가족이 중심이었고 자신보다 먼저였다고 한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았던 세월처럼, 그녀도 그렇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50년을 넘게 성실하게 살았다. 그녀의 삶도 충분히 존중한다. 하지만 나보다 타인이 먼저였던 삶은 그 끝에 공허함이 몰려들어 크나큰 상실감을 주는 경우가 무수히 많다. 가족중심으로 살던 그녀들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이 들 때,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 늦은 때란 없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이라는 역할에 충실했던 그녀들을 존경한다. 또한 지금이라도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녀들을 응원한다.
늘 가족부터 챙겼던 그녀는 이번 여행을 오기 전에도 역시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가족들이 반찬걱정 하지 않도록 냉장고 안을 꽉꽉 채워놓고 왔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집안을 살펴놓고 오느라 밤잠도 못 잤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여행을 하는 게 맞냐는 나의 어리석은 물음에 그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처음으로 가족 없이 하는 여행 생각에 설레서 어차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자주 하고 싶어서, 가족들이 내 여행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놓고 나온 거야."
소름이 돋게 감동적이었다.
소녀 같은 감성으로 여행을 기대하는 그녀를 위해 오늘은 "숨, 도"라는 인공 정원을 선택했다. 수국이 만개하는 시기였기에 수국과 하귤의 과수가 탐스러운 곳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녀가 좋아할 것을 기대한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 둘은 똑같은 마음으로 감탄하고 즐겼다.
같은 종의 식물이어도 육지에서 생육하는 것과 제주에서 피고 지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조금씩 모양에 차이가 있고 색깔이 달랐다. 환경에 따라 아주 작은 식물조차도 다르게 생존하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제주에는 관광 명소로 인정받은 유명한 인공 정원이 몇 곳이 있다. 이미 제주 자체가 자연박물관이나 다름없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녹여 정원을 꾸며놓은 사람들의 정성에 감동할만한 곳들이 있다. 이 "숨, 도"는 그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 중 하나이다. 솔직히 제주에 가면 꼭 들러볼 곳으로 추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감동의 강도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여행 중에 잠시 몸을 쉬게 하면서 눈을 즐겁게 해 주기에는 충분한 곳이라 생각한다.
좋은 곳에서 예쁜 것들을 보고 걸으면서 내면을 정화하다 보면 내 안에 있던 어두운 생각들이 빠져나오는 것을 느낀다. 아주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그 무엇을 끄집어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들을 접하면서 감동하고 그 감동에 감사를 하다 보면 어느덧 어두운 그림자가 그 범위를 좁혀간다.
"예전에 나는" 어땠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 "그 생각이 바뀌고 있어..."라는 식으로 변해가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혼자가 편했던 나는 왜 혼자가 편했을까.
나보다 남을 먼저 챙기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가족은 물론이고 나 빼고 모든 사람을 섬세하게 배려하던 그 바보 같은 사람이 나였다. 어릴 때부터 대가족 안에서 자랐던 나는 눈치가 빨랐고 어른들에게 이쁨을 한 몸에 받던 아이였다. 이쁨 받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고 환경이 그러했다.
육 남매지만 형제가 다섯인 집에 장남의 장녀인 나는 막내삼촌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품은 내 차지였다. 시커먼 남자들만 키우던 할머니에게 작고 여린 손녀의 등장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남편의 역할까지 해내는 장남이 낳은 손녀는 온 집안에 웃음 버튼이었다. 나는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내가 받은 사랑은 또한 나를 통해 타인에게 흘러갔다.
가난했지만 나의 유년은 행복했다. 어른들은 힘들었겠지만 나에게 가난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을 친구들과 나누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도움을 주는 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성장하면서 나의 성향은 점점 강화되었고 슬롯생활에서도 나의 기질은 그대로 발현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강한 의문을 남긴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왜 자신의 것을 이렇게 쉽게 나누어 주나요? 상대방이 불쌍해서 그런가요?"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가진 것은 옆 짝꿍에게라도 나눠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었다. 친구와 같이 먹기 위해 집에서 만든 간식을 먹지 않고 다음 날 학교에 가져가곤 했다. 준비해 간 것이 두 개인데 함께 있는 친구가 다섯 명이면 꺼내놓지도 못했다. 못 받는 다른 친구들이 속상해할까 봐 말이다. 그랬던 내게 근본적인 질문이 생겼다.
왜? 나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을 나누는 것에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관계 속에서 호의를 권리로 받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여리기만 했던 속살에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보다 더 민감하게 배려했던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다행인지, 인정욕구나 주인공 병 같은 결핍은 아니었다. 기질적으로 이타성이 다른 사람보다 강한 편에 속했다. 타인을 돕고 그 결과마저 긍정적이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의 선의를 자칫 오지랖이나 거만함으로 받는 사람들로 인해 비난을 받거나 할 때에는 나 역시도 상처를 받았다.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으로 나 역시 방어기제가 생겼고 차츰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계속 타인에게 휘둘리게 되면서 정답을 찾기 위한 방황만 지속되었다. 그 뫼비우스의 띠 같은 패턴을 끊기 위해 온전한 홀로서기를 위해 바카라을 읽고 강연을 듣고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내 안의 나와 대화를 하며 보내다 보니 혼자가 편해지고 "차라리 혼자"라는 생각이 고착화되어갔다. 누구에게 맞추고 기다리고 살피는 일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어차피 오래 만날 관계가 아니라면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결정하고 처음부터 놓아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관계에 연연하던 예전의 내 모습의 반대편에서 타인을 대하는 나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편했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불편을 끼치지 않고 아무도 손해 보는 일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 무해한 일 아닌가 생각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슬롯적 동물이다. 관계가 없이 고립되면 잘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는 동안은 함께 잘,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끼리 도우며 잘 살아내고 마지막에 평안하게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심을 하고 난 후 새로 만나는 인연은 그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고 내 편이 되어 주려 노력해 준다.
이제는 혼자 하는 여행도 좋지만 함께 하는 여행도 즐겁다. 내가 상대를 맞추듯 상대도 나를 배려하는 것을 느끼니 기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예쁜 정원을 걸으며 사춘기 소녀들처럼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냥 행복했다. 정원을 돌아 나오면서 마주친 두 눈이 반짝였다. 그 눈에 비친 나의 눈빛도 행복해 보였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