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아래 첫 마을, 광평리에서 머물다.
포도뮤지엄에서의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지만, 당장 현실이 그러하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길이 험난한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최대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우선 버스를 내렸던 곳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버스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방이 흐릿한 가운데 마을 표지석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마을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길목에 놓여있는 것들을 보면서 작지만 따뜻한 마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엽게 재치도 있고 마을 사람들끼리 정겹게 살아가는 곳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와서 그런 것인지 가구 수가 많지 않아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정말 조용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막연하게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방인인 내가 마을 안을 기웃거리기라도 한다면 그들 또한 두렵지 않겠는가.
처음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안개가 자욱하고 주변을 구분할 수 없어서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지 않고 있다가 버스를 기다리면서 조금씩 마음이 진정이 되어 동네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평리가 한라산 아래 첫 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뒤늦게 발견했다. 이 마을이 세상 조용한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인기척 없던 마을에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멀리서 들려왔다. 저 안개 자욱한 곳 너머에 학교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설마 환청은 아니겠지 싶은 생각이 들 때 즈음 비를 맞으며 줄지어 걸어 내려오는 아이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인솔하는 어른들 몇 명과 함께 비를 몸으로 맞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오는 모습이 세상 무해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상당히 가난했던 것 같다. 자라는 동안은 내가 처한 환경이 어떤 것인지 비교할 대상이 딱히 없었다. 어쩌다 형편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도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나의 유년시절은 걱정 없이 행복했다. 좋은 이웃들과 서로 챙겨주면서 콩 한쪽도 나눠먹으며 살았었다.
따뜻한 화장실이 우리 가족의 생활 속에 들어온 것도 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시골 촌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이라고 온 곳이 경기도 어느 구석진 마을이었다. 그 마을도 여전히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도시화가 되고 있던 상태였던 듯하다.
초등학교 6년을 걸어 다녔다. 마을버스라는 것은 없었다. 큰 도로만 다니는 시내버스가 있긴 했지만 그 버스를 타고 내려도 내가 사는 마을까지는 15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부터 걸어서 다녔다. 편도 40분 거리였다. 어린아이 걸음이었으니 더 더뎠을 것이다. 그 길을 걸어서 통학하는 내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중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비다.
요즘처럼 일기예보가 잘 맞는 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가져갔다가 비가 오지 않아 학교에 우산을 놓고 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쩌다 예쁜 우산을 놓고 온 날이면 애가 탔다. 다음 날 그 우산이 사라졌을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아침에 쨍쨍했던 하늘이 오후부터 시커멓게 변하더니 하굣길에 장대비가 내리는 날은 각오하고 걸었다. 옷이 젖는 것은 오히려 괜찮았다. 일부러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걷기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바카라가방 속 바카라과 노트가 젖어서 변형되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 시절에도 우비는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무던했던 내 성격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노란 우비 하나 사 달라고 말했을 법도 하거늘, 늘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어린 나를 만나러 가서 얘기해 주고 싶다.
"넌 아직 어려. 부모님께 더 많이 의지해도 돼. 힘들 때는 소리 내어 울어도 돼."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은 엄마나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친구들이 나오면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받아주고 빠른 속도로 우산 속으로 들어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 시절은 그래도 속상하지 않았다. 비를 맞고 집에 가는 길이 싫지는 않았다. 엄마가 오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지 않았다. 걷다가 나와 같은 친구를 만나면 마냥 좋아 수다 떨며 걷는 그 길을 즐겼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비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젖은 후 집에 돌아와 처리해야 할 것들이 귀찮아졌을 뿐이다. 제주 여행을 와서 우비를 입고도 빗 속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의 기억 덕분이었다. 제주 올레길을 걷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으니 나흘 내내 비가 오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때문에 주춤했을 뿐 비가 오는 자체는 나의 여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흘 째 비가 오고 있는 상태가 그 양상이 매번 다른 상태를 보고 제주의 일기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몸으로 느끼면서 제주 여행 계획은 아무리 꼼꼼하게 짜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비 덕분에 미술관을 갔고 미술관에 왔기 때문에 광평리의 풍경도 우연히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은 역시 우연이 주는 선물에 감동이 더 크다.
기약 없이 내리는 빗속을 하염없이 서서 눈앞에 지나가는 풍경들을 한참 감상하면서 몽글몽글 추억 돋는 감성에 흠뻑 빠져들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유년 시절이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한 컷 한 컷 명료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성장통을 겪었던 시절도 직면해 냈다. 너무 아픈 시기의 기억은 기억 창고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넣어 두고 꺼내지 않았었는데 이 날만큼은 순순히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추억 한 장 한 장을 꺼내에 먼지를 털어내고 웃으며 들여다보았다.
지금 내가 제주에 홀로 여행을 와서 이렇게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이유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장통을 심하게 앓았다.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 정말 무난하게 지나갔다. 신체적인 2차 성징은 정상이었다. 방을 같이 썼던 고모와 공유하면서 도움을 받았고 친구들과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유연하게 2차 성징을 받아들이고 체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서적 사춘기는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랄총량의 법칙"이라 했는가? 개개인이 가진 외부로 표출해야 할 감정은 꽁꽁 묶어 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어디에든 분출이 되어야 끝이 난다. 나 또한 그랬다. 오히려 성년이 한참 지난 후에 때늦은 사춘기가 왔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이곳에 왔는가, 왜 이런 모습인가.
나의 의지일 수 없던 많은 선택과 결과들에 화가 났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외부에는 드러내지 않고 혼자만의 성장통에 시달렸다.
처음엔 온전히 혼자만의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든 질문은 뱅뱅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내 안으로 파고드는 어두운 그림자를 처리하지 못하면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침몰할 것 같았다.
이미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우습지만,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만큼은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었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답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었다. 주변에서 많이 걱정하는 것은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안에 답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도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찾아내야 했다. 그 답을. 그리고 결국 방법을 찾았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만큼은 만족스러운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별것 아닌, 내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만큼은 내가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내 시간 속에서 나의 선택은 전부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기로 결정했다.
행복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선택으로 내가 우울하다면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선택으로 내가 힘들다면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결괏값이 나의 행복이 아니라면 어떠한 인풋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기적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희생으로 누군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내가 행복하면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모든 선택의 결과는 나의 행복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이후로 나는 천천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자유롭다. 제주 여행을 홀로 떠나온다고 했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성장통을 겪고 나서 진정한 홀로서기를 위해 부단히 애썼고 지금도 여전히 홀로서기를 하는 중이지만 예전처럼 힘들지 않다. 그런 내가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잘 살아왔구나 싶었다.
이번 여행의 시작도 사실 현실도피적인 이유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잠시 괴롭다가 결론이 났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가지 않는 것이 맞다. 결론을 내리고 나니 오롯이 나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었다. 안갯속에 묻혀있는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회고의 시간을 가진 듯했다.
촉촉한 감성에 젖어 나의 삶을 돌아보다 보니 예약했던 버스가 이동하고 있는 경로에 대한 알람이 울렸다. 제주도는 관광지가 오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정상 노선으로 버스가 다닐 수 없는 곳들이 많다. 그래서 제주시에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버스도 예약을 하면 관광객이 있는 곳까지 픽업하러 와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었다. 그 서비스를 내가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인간의 감당할 수준을 넘었다. 걸어서 큰길로 나가기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어서 해당 서비스를 예약했고 버스가 잡히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잡히고 나서도 35분을 기다려야 탈 수 있다고 알람이 왔다.
하... 처음엔 망연자실했다. 이 빗속에 35분을 더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오히려 좋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감성놀이를 충분히 더 즐기자.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추억여행을 즐겼다. 안갯속에서 버스가 오는 소리가 들릴 때 꿈에서 깬 듯 현실로 돌아왔다. 그 이후는 설명할 것도 없다.
큰길에서 시외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까지 데려다준 후 버스는 유유히 사라졌고 숙소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무사히 돌아왔다. 그 후로는 기억에 없다.
그날은 숙면을 취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