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뜨개공방을 하는 지인과 하루를 보내다.
일기예보 상으로 3, 4일간은 제주에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 했다. 한라산도 올라갔다 왔고 제주의 숲도 다녀왔고 김녕해안길도 걸어 봤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가기로 하고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비도 오고 홀로 여행하느라 길게 대화를 한 일이 없어서 적적했는데 흔쾌히 초대해 준 지인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지인의 작업실로 가는 길에 제주의 도시 풍경을 담아 보자고 마음먹고 약속 장소까지 걸었다.
숙소를 출발해서 도착지까지 오락가락하는 비에 장단 맞춰 우산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나중엔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우산을 접고 비를 맞았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낯익은 거리가 나오더니 제주동문시간이 보였다. 제주 올 때마다 들르던 곳이라 익숙해져서 반가웠다. 올 때마다 간식으로 구매했던 오메기떡을 사기 위해 일부러 들어갔다. 물론 현지인들은 오메기떡을 반기지는 않았지만 빈 손으로 가기 멋쩍어서 한 상자 구매해서 들고 갔다.
지인이 준비해 놓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제주시에 거주하는 도시여자라고 주장하는 지인과 오랜만에 실컷 웃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지인의 지인까지 소개받으면서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했으나 현지인들은 오히려 육지에서 흔하게 먹는 음식들을 이야기하면서 한참을 또 서로 다른 시선에 대해서도 대화를 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 제주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 제주로 시집을 오게 된 사람과 제주는 그저 관광객으로만 다녀갔던 사람 셋이서 각자가 경험한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별 것 아닌 것에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결국, 점심식사는 제주동문시장 한복판에 있는 줄 서서 먹는 "서울떡볶이"집으로 결정했다. 제주 원주민들도 사다가 먹는 집이라더니 정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외국인 가족들도 테이블에 가득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모습에 흐뭇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최애 분식 메뉴는 모두 시켜서 먹었다. 셋 다 만족했다. 일일이 평가하자면 끝이 없다. 음식은 분위기다. 그날의 분위기, 함께 먹는 사람과 주변의 분위기가 좋으니 다 좋았다.
취향에 대한 매개가 없었으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만나게 되는 인연이 귀하다는 생각을 새삼했다.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낯설고 어려운 용어들을 인강으로 들으면서 익숙해지지 않는 수업을 견디기 위해 찾은 도구가 뜨개질이었다.
손을 움직여 무언가라도 하고 있으면 졸음도 덜 할 것이고, 작지만 생산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만족도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적중했다. 멀티플레이가 되지 않는 나이지만 LA로 이민 간 할머니가 가족들이 일하러 나가고 나면 혼자 남은 집에서 TV를 켜놓고 하루 종일 듣기만 했는데 영어가 어느 날 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주객전도가 일어나기가 다반사였다.
만족도가 높은 결과물을 만들려면 도안을 꼼꼼하게 읽어야 했고 도안에서 설명한 대로 따라 하다 보면 동영상 수업은 이미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합리화가 편한 나는 수업은 다 들은 것으로 간주했고 동영상 수업을 볼 때마다 뜨개질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영상의 수업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들리는 목소리가 친근해지고 수업 방식이 익숙해지니 텍스트가 귀에 박혀서 기억이 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반갑고 고마웠다. 수업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뜨개질을 하는 빈도수가 줄어들었고 점점 그 차이가 확연하게 커졌다. 안정적으로 공인중개사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험 날이 가까워 지자 오히려 뜨개 수업이 방해가 되는 기분이 되었다. 자격증 과정을 수강하면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의외로 힘든 과정이었다. 시험공부와 병행하기 버거워지는 작품들이 나오면서 뜨개 수업을 시험이 끝난 후로 미루게 되었다. 그런데, 한걸음 한걸음 거북이걸음처럼 느리지만 공인중개사 시험공부와 동행했던 뜨개 수업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중간에 포기했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경험을 뜨개 수업을 통해 얻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모른다.
시험에 대한 부담을 덜고 나니 뜨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미 벌려놓은 일이니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격증을 어디에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배워두면 어디든 쓰일모가 있을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과정을 끝냈다. 그 과정 속에서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일부러 만들기도 어려운 자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낯설지 않게 대화가 이루어지고 끊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관계가 깊어야만 가치 있다고 여겼던 편견을 확실하게 깨부수는 경험을 하면서 대인관계에 대한 가치관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취향이 같다면 얼마든 함께 걸어갈 수 있고 함께 걷다가도 갈림기에서 각자의 길로 나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수월해졌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관계가 세상에는 존재하고 나 역시도 그런 관계를 그물망처럼 얼기설기 엮어서 외롭지 않게 평생을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주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위해 부수적 도구였던 뜨개수업을 통해 더 많은 인생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제주에 사는 지인도 그렇게 만들어진 뜨개 수업에서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 관계였다. 육지에서 수업할 때 만나서 몇 번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했을 뿐인데, 반 농담으로 던진 말, "제주 가면 연락해도 되나요?"에 진지하게 "꼭 연락 주세요."라는 답을 듣고 실행에 옮겼던 터였다.
예전 같으면 오랫동안 고민을 했을 것이다. 연락할까 말까를 수십 번 뒤엎으면서 고민고민하다가 포기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면 어떻게 하지? 농담을 진담으로 믿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등등 쓸데없는 생각들로 시간을 낭비하다가 의미 없는 결정을 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제주에 왔고 연락을 해서 만나지면 더 나은 인연으로 발전하는 것이고 못 만난다면 아직 우리의 시간이 아닌 것이라 여기면 끝이다. 내가 던진 패를 상대가 어떻게 받느냐는 상대방의 선택이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내가 좋았다.
그렇게 해서 인연이 된 세 사람은 그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나누고 이야기하며 추억을 쌓아갔다. 미래를 기약하기까지 하면서 같은 취향으로 똘똘 뭉쳤다.
바깥은 폭우가 쏟아지고 강한 바람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세 사람이 있는 공간은 아늑하기만 했다. 시간여행을 하다가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온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이 제주라는 것을 잊었을 정도였다.
제주여행이라면 대자연을 경험하기 위해 다이내믹한 활동을 계획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소소하게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도 충분한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아이템을 선택해서 그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작지면 행복한 경험이 쌓이면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게으른 나를 각성하게 하고 일상을 유지할 힘을 얻는다. 긴 여행의 피로가 지인과의 만남으로 회복이 되었고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찾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시작한 손뜨개가 나에게 새로운 꿈을 안겨 주었다. "뜨개질하는 예쁜 동네 할머니"가 되는 것이 나의 최종 꿈이 되었다. 그 꿈을 위해 나는 또 사브작사브작 걸어갈 것이다. 그 길이 꽃길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기억 만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