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을 헤매다가 이승악에 오르다.
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출발은 했지만 잘못 들어간 길에서 만난 울창하고 깊은 숲 속을 두 번이나 헤매고 나왔더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처음부터 편한 길을 선택했더라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후회는 없다. 그 숲에서 만난 시간이 신비롭고 묘하게 따뜻했다. 나를 포근하게 안아 주면서 위로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 있는 동안의 시간이 짧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나와 확인해 보니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목적했던 "이승악 입구"에 도착해서는 지나간 시간은 접어놓고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오름 입구라고 하기에는 다소 쌩뚱맞은 분위기였다. 포장도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주변은 특별할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걷다 보면 이정표라도 나오겠지 싶어서 일단은 걸었다.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니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광활한 평지에 초목이 가득한데, 저 멀리 한라산이 웅장하게 느껴졌다. 구름에 가려져서 오히려 더 신비롭기까지 했다.
다소 지루한 듯, 앞으로 쭉 뻗어있는 길을 걷다가 풀을 뜯고 있는 방목된 소들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보통 우사에 몰아 넣고 똥이 가득한 바닥에서 서로의 몸을 부비며 비좁은 곳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내 속이 더 시원했다. 살이 찌지 않아 뼈가 앙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저들은 마냥 평화로워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더니,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한 녀석이 내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예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열어놓고 계속 그들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던 덕에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알았다.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사진을 찍기 좋게 앞으로 나와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녀석이 마치 그 무리들 속에서도 핵인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길을 20여 분을 걸은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힘들지 않게 걸어 도착한 곳은 정말 "이승악"이었다. 오전에 잠깐 들어갔었던 물오름과는 그 규모와 분위가가 많이 다른 곳이었다. 이승이오름 탐방 안내도를 봐도 제주4.3주악주둔소에서 이승악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결국은 내가 차분하게 길을 잘 찾지 못했다는 것인데, 많이 아쉬웠다.
이번에 한라산 둘레길을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에 제주는 다시 올 예정이다. 그 때는 전략적으로 한라산둘레길 완주를 계획해서 9코스 모두를 걸어보아야 겠다.
이승이오름 정상 바로 아래의 모습이다. 허기가 져서 정상을 코앞에 두고 걷기가 힘들었다. 오전 내내 헛걸음을 하면서 긴장했던 몸이 목적지가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다리가 풀렸던 듯하다. 힘내서 가자고 나를 독려할 수도 있었지만, 계단에 앉아 잠시 쉬었다. 점심으로 싸가지고 온 도시락은 정상에서 먹을 예정이지만, 잠시라도 쉬면서 몸을 다독였다. 초콜렛 하나를 꺼내어 먹었다. 캬~ 정말 꿀맛이었다.
이승악 전망대에 올라서 본 한라산의 모습이다. 비는 그쳤지만 뜨거운 지열로 공중에 둥둥 떠있는 구름이 한가롭다.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구름마져 너그러워 보였다.
배낭을 내리고 편하게 앉아 30분 정도 그 시간을 누렸다. 시원한 그늘에서 땀도 식히고 간단하게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음미하면서 행복했다. 몇 년 전 제주 한달살이 하러 내려온 부모님 뵈러 왔다가 같이 걸었던 길이 기억나면서 놀라웠다. 그 때는 이승악인줄 모르고 부모님만 따라 걸었던 곳인데 이번에 홀로 와서 걷다 보니 익숙한 분위기가 기억났다.
전망대에 올라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던 모습까지 기억이 나면서, 추억을 쌓는것이 어떤 의미인지 절감했다. 지금은 돌아갈 집이 있고 그 집에 부모님이 계시니 마냥 행복하게 생각하며 마무리할 수 있지만, 만약 두 분이 모두 안계실 때 붙잡을 것이 추억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서럽기도 할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더 확실해진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 이유다. 성공하고 나서 효도하면 되지, 돈 많이 벌면 그 돈으로 지원해 주면 되지 했던 어리석은 생각들은 안일했다.
곁에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잘 한다는 것은 함께 시간을 자주 보내야 하는 것이다.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오늘 먹은 마음은 반드시 실천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해 본다.
이승이오름은 100대 명품 숲이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사진에 담아내지 못하는 실력이 아쉬웠다. 담아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제주의 숲이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보고 싶은데, 그 분위기와 감정은 사진에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애써서 다각도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육지의 숲에서는 쉽게 볼수 없는 숲과 나무들을 내 기억에라도 남겨두고 싶어서.
한참을 이곳저곳 둘러보며 걷다보면 저절로 걸음이 멈추는 지점이 나온다.
바로 삼나무 숲 입구이다.
삼나무숲 입구라는 이정표는 없지만 그 앞에 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여기서부터 또다른 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하늘은 가렸지만 따뜻한 볕은 고스란히 숲 속 생명에게는 전달이 된다. 그 빛이 또다른 그림체를 만들어 낸다.
이 숩을 걷는 내내 웅장한 협주곡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진공 상태에 있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몇 분이 있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교향곡이 들리는 듯했고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고전의 작가들이 산바카라을 했고, 음악가들이 숲을 사랑했던 이유가 이런 경험때문이 아니었을까.
함께 온 여행자가 있었더라도 대화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아주 작은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고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믿지 못할테지만, 경험한 나는 마냥 행복했다. 그거면 그만이다.
미야자키하야오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의 세계관을 담아낸 대자연의 그림들 때문이었다. 그 광활한 자연 안에 작은 벌레 하나도 놓치지 않고 표현해 내는 거장의 따뜻함이 좋아서였다.
이 숲에서 느끼고 경험한 감정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표현해 내고 싶다는 욕구가 슬며시 올라왔지만 곧 스스로 객관화하고 사진 촬영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미야자키하야오가 평생 어떤 삶을 살았을지 추측해 보면서 그 삶이 더 부러워지기도 했다.
위대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슴벅찬 경험을 하고 나면 나약한 나에게 가끔 아쉬워하곤 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살 수는 없었는가 돌아보다가 곧 인정한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는 것이다. 내 그릇의 크기는 한정짓고 싶지 않다. 최대로 키워본 적 없으니 그 크기를 가늠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알아야 보이고 찾아야 발견하는 것이 이치이다.
환경적 이유였든 자발적 선택이었든 지나온 시간은 결국 내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남은 시간에 집중하자.
다른 생명을 시기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숲 속 생명들을 바라보며 겸허해지자. 나 자신과 잘 살아내는데 집중하자.
P.S 한라산둘레길에 있는 삼나무 숲은 이승악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아래 사진 속 빨간색 선이 이승이오름 둘레길이고 형광색으로 별표가 된 사각형 안에 있는 삼나무 숲길은 한라산 둘레길 구간 안에 포함된 길이었다. 나는 이승이오름 둘레길 구간 안에 삼나무 숲이 있는 줄로. 확신하고 그 길 끝에 가면 다시 입구가 나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가도 숲이 끝나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한라산 안내센터에 전화로 문의를 해보고 나서야 내가 위험한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고 뱀도 않은 곳이라 그 길로 가지 말라 신신 당부하시며 즉시 돌아서 나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걱정 가득한 안내자의 말에 위로가 되면서도 나의 확신의 근거가 의심스러워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침부터 끝날 때까지 와 본 적도 없는 곳을 여행하면서 나는 왜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하고 걷기만 했던 것일까.
아직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